2020.05.19. | 생명의 삶 | 황영식 목사
샬롬
빛으로 교회 황영식 목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오늘 여러분 가운데 임하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묵상하실 하나님 말씀은 신명기 20장 10절로 20절 말씀입니다.
화평을 제안할 때와
죄악을 진멸할 때
신명기 20장 10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10절로 18절 말씀은 전쟁 수행에 관한 법 입니다.
거룩한 전쟁은 막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절차가 규정 되어져 있다 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주 놀라운 그 순서가 하나 있어요.
뭐냐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선언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선언해놓고 전쟁을 해요. 특별하죠 아주?
신명기 20장 10절 말씀입니다.
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특별 하죠?
만약 상대가 평화를 수락하면 죽이는 일이 없이 그 나라를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평화를 수락하지 않고 전쟁을 원하면, 전쟁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들을 다 죽여야만된다는 것입니다.
죽이되 가나안 밖에 있는 성읍에서는 남자들만 죽여야 됩니다.
다 죽이면 안되요.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유아는 살려 둬야 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0장 13절로 14절에 보니까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나안의 있는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으로 오염시킬 가능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모두 하나님은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마음 제사는 무엇입니까?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될까요?
그 첫번째는 내 마음의 분명히 이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곰보빵》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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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보면 이런 제목의 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의 이것이 있었기에...'
짧은 글이니까.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기름때 치든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도 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있었다.
아무도 사가지 않는 그림 옆에 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계셨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입시 학원 강사와 야학교사로 일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기름때 치든 작업복을 입고 괴물같은 기계 아래 누워 공돌이 생활을 갖다가 오래 했읍니다.
가난한 살림 이었지만 밤을 세워 그림을 그리며 화가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림을 팔기 위해 마로니아 공원과 정독도서관 앞으로 갔지만,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그 사람의 존재감이 기도했고 자존감이 얻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체였었죠? 그런데 아무도 사가 주질 않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랜시간 원고를 쓰는 동안 우울증이 밀려왔고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수 없이 글을 수정하며 완성하였습니다.
완성한 얼굴을 원고를 들고 5군데 출판사를 찾아 가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마침내 6번째 출판사가 그의 책을 출판 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책은 300만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어졌습니다.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 씨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읽어 보셨죠?
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그를 일어서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름때 치든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전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의 말씀이 꼭 가득차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시편 119편 50절에 보니까.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나의 고난 중의 위로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신 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오늘 하루 여러분들에게 힘이 되어 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내 마음의 지성소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나요?
어떻게 하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두번째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그림이 아니에요. 큰 그림 입니다.
모세는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무를 마구 베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나무를 잘 보존을 하면 거기에 열매가 맺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참 지혜롭지요?
신명기 20장 19 절로 20절 말씀을 보니까.
19 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20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친환경적인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섬세하게, 자세하게, 인간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이렇게 섬세하게 디테일하게 말씀을 해 주실까?
이게 하나님의 마음 이라는 사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시간을 그때로 다시 돌릴 수만 있었다면 ...' 그런 생각들도 있죠.
또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이런 생각이 들 때 이지 않습니까?
역사 속에서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1867년 러시아가요.
미국의 단돈 720만 달러를 받고 알래스카를 매각했습니다. 팔았습니다.
알래스카에 매장된 유전은요. 지구 매장 양에 10분의 일이라 그럽니다.
매장량의 10분의 1이래요 엄청나죠?
또 풍부한 지하자원이 엄청 나구요.
또 군사적 요지로서도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당시 러시아 관리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 복덩어리 땅을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일과 관련하여서요.
학자가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사고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참 의미있는 말이에요.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사고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의 눈으로 보면 무엇이 좋은 선택이고, 무엇이 나쁜 선택인지 보이지 말 알지만,
그 때 당시에 사고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의 끝을 볼 수 있고, 그 끝을 본 사람의 관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지금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 것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시작 뿐 아니라, 지금 그리고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처음과 끝을 말해주는 하나님 말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생각하시면서,
처음과 끝을 보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해 드립니다.
나는 어떤 자세로
말씀을 대하고 있나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마음에 지성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앞에 있는 고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끝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의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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