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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현재도 미래도 부활 생명을 누립니다 (요한복음 11:17~37)


2020.02.13.목 생명의 삶 오민 목사



할렐루야.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께서 인격적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모두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정직하게 쏟아 놓으며 나아갈 때, 그분께서 의뢰해 주시며 함께 기뻐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친밀한 교제하는 가운데, 풍성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는 현재도 미래도 

부활 생명을 누립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에서 37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곳에 도달했을 때 나사로는 죽은지 이미 사흘이 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오신다는 말을 마르다와 마리아는 전해 들었고, 평상시 활동적이고 분주한 성품에 마르다는 바로 일어나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안은 슬픔에 젖어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 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22절 입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멀리서 계셔서 자기 오빠를 치료할 수 없었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 라고 마르다는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은 믿음의 고백 인 것 같지만, 

실제로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때 예수님이 만약 거기에 계셨더라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었겠지만, 오라버니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 예수님도 하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과 범위와 시간과 공간을 제안 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였고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제한적인 믿음이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하실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24 절입니다.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 당시 유대교 안에는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고, 마르다는 그 일반적인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마르다에게 막연히 장래에 일어날 일로만 여겨졌고, 교리적 지식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녀에게는 전혀 능력과 소망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그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그녀에게 소망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적이며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절, 26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신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부활과 생명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너의 부활이요, 너의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며,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도는, 죽었다 하더라도 육체적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영생은 이미 이 땅에서 성도가 소유하고 있으며, 육체적인 죽음을 맛볼지라도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이 한낱 교리로만 막연한 미래에 사건으로만 나타내지기를 거부하시고,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며 인격적으로 교제할 때 바로 부활 생명을 현재 이 자리에서 누르게 된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마르다에게 직접 여쭤보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은 마르다 에게 일반적 지식이고, 막연한 지식이 아닌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27절입니다.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의 대답은 약간 동문서답 같은 대답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믿음의 기초를 굳건히 붙잡은 것입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확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 생활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마르다와 같이 상황과 능력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성경의 말씀이 막연하게 지식에만 머물러 있거나, 내 개인적인 삶에 전혀 능력과 소망으로 다가오고 있지않은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향한 마르다에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이 땅 가운데서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해 주신

부활 신앙은 어떤 것인가요?

내가 날마다 생명을 누리고

부활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르신다 고 말합니다.

처음에 슬픔에 젖어 앉아 있었던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소리에 지체 없이 급하게 나아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32절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만약에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 또한 말을 나와 같이 제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안은 마르다 보다 훨씬 더 슬픈 감정을 드러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울었고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33절입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통해 하다는 것은 크게 분노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속으로 부터 괴로움이 올라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하고 깊이 탄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나사로를 살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기서 단순히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하고 비통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음의 세력에 짓눌려 있는 당신의 자녀를 안타까워 하시며,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괴로워하시며 긍휼한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애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어디 두었냐' 라고 말씀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35절입니다.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의 눈물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예수님은 우리가 느끼는 거와 같이 똑같이 느끼시는 참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 아픔과 슬픔을 아시며 함께 공감하시며 슬퍼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종교에서 나오는 신들처럼 저멀리 떨어져 인간을 관찰만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보면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고 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고통에 냉담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아픔과 슬픔을 아시고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하시고 함께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질고를 당하고, 슬픔을 당한자를 위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 한 가운데, 고통 가운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위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우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36절에서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또한 까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다르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똑같이 예수님에 대한 제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성품이 다른 이 두 자매를 다루시고 인도하실 때, 그 성품에 맞게 가장 적절하게 필요한 방법으로 다가가시고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저와 여러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질, 성품, 연약함, 연약한 불신앙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 앞에 겸손히 눈물을 흘리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뤄가시며 빚어 가시며, 세워 가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주님을 더 신뢰하며 주님앞에 정직히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갈 때,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성품과 기질을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다루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더욱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저희 모두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나는 영혼들의 아픔에

얼마나 공감하고 아파하며

눈물 흘리나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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