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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들러리 되어 기쁨으로 충만한 제자 (요한복음 3:22~36)


2020.01.10. 생명의 삶 이해영 목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이 분명한 신앙이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진실된 의미로서, 또 능력으로서, 또 결과로써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혹시 신앙과 삶이 매우 단절되어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은 주일날 교회를 다녀 온 정도로만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오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런 가슴 뭉클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얼마나 우리들의 가슴 두근거리게할 전 인생이 되어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는 오늘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할지, 그 소중한 도전과 또 격려와 또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 속에 다시 살아 숨쉬는 능력의 신앙생활이 다시 시작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들러리 되어 

기쁨으로 충만한 제자


요한복음 3장 22절에서 36절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 크리스도, 예수님 그 이후의 삶이 궁금하시죠?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사역에 주목하셨는지 

요한복음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2절과 23절의 말씀입니다.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렇게 세례를 베푸는 이 사역이 공교롭게도 일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틀림없이 세레 요한의 사명이나 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명과 목표가 일치된 한 방향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특별히 세레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의 사역을 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렘 이라고 하는 것은 샬롬과 같은 말로써 평화라는 뜻이 되겠고 

또 애논 이라고 하는 것은 이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살렘 가까운 애논 이라고 하는 표현은 '샬롬에 가까운 샘' 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생각해 보건대 예수님의 세례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사실 본질상 같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정말 죄사함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죄사함에 이끄는 회개에 이르는 세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진정한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시는 것이지만,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섬김과 도전과 봉사는 세례 요한이 베풀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세례이지만 그 본질은 다를 수 있듯이 샬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진정한 샬롬은 하나이겠지만 그 샬롬을 향해가는 그 길은 매우 가까이에 샘이 흘러 내리고 있다' 라는 것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을 설명해주는 어떤 그림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들도 비록 구원은 줄 수 없지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자로서 

얼마든지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죄사함에 세례는 줄 수 없지만,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마음을 함께 전하고 나누는 그런 세례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동일한 목적을, 동일한 방향을, 그리고 동일한 삶의 여정을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우리는 세례를 베푸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이 행하신 이 세례의 사역 처럼, 

우리도 함께 세례 요한과 더불어 세례 사역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내주고, 죽음에서 살아나 영생으로 인도해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25절의 말씀을 읽어 봅니다.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이때 세례 요한의 한 제자가 어느 유대인과 변론이 생겼다 라고 말합니다.

무슨 정결예식에 관한 그런 변론이라고 말했는데, 어떤 정결예식에 관한 논쟁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와, 당시 유대인들이 주장하던 율법과 전통에 의해서 정결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정결예식에 두가지의 차이에 대해서 아마 불편한 마음으로써의 논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주장하고 있는 율법과 전통에 의한 정결예식이 진정으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결이다' 라는 것을 의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논쟁만 있을 뿐입니다.


세례가 베풀어지는 애논을 찾아와서 논쟁을 시도하고 있는 이 유대인은 분명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자체가 샬롬에서 또 살렘에서 더 많이 떨어진 애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6절을 또 읽어봅니다.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정결예식에 관한 논쟁은 이제 세례에 주도권 문제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 역시 회개케 하는 세례와는 달리 

'누구의 세례냐? 세례 요한의 세례냐? 예수님의 세례냐?' 라고 하는 것에 어떤 경쟁심에 그렇게 사로 잡혔던 것 같습니다.

비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죠.


세례는 세례 요한의 전매특허 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겠지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라는 이 겸손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일련의 시기심을 그렇게 갖게 하는 그런 요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는 세례 요한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은 

이 살렘에서 더 많이 떨어져 가고 있는 그런 애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적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죠.


우리도 이렇게 본질이 아닌 비 본질에 마음과 생애를 그렇게 낭비한 채로 점점 샬롬에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인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구원에게로 더 가까이, 그리고 생명에게로 더 가까이, 진정한 샬롬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오늘 이 하루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게에서

세례 요한이 맛본 기쁨은

어떤 것이었나요?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로서

기쁨을 맛본 적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가는 상황을 보면서, 걱정과 근심으로 세례 요한에게 물었을 때 세례 요한의 대답이 궁금합니다. 그는 무엇을 답했을까요? 27절과 28절의 말씀입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리 요한은 감사하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그와 함께하고 있는 제자들 역시 이제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될지도 아주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에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찾고 경험하는 것 만큼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분명한 정체성을 확신하고 있으며, 사명까지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많은 동역자들에게 이것을 증언 해야할 이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라고 다른 이들에게 까지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성도님들의 삶 속에서도 고스란히 이루어지고 우리들의 진실한 신앙 고백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아가서 29절과도 같이 감동스러운 자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놀랍게도 세례 요한은 혼인 잔치를 언급하면서 자신을 그 혼인잔치 참석한 하객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신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랑의 친구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친구는 오직 신랑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뿐이라고 본질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방금 전 어느 유대인과 정결 예식에 관하여서 논쟁 했었지요.

그것 역시 가나의 혼인 잔치를 연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묵상 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 6절 인데요.

요한복음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여기서 말하는 '거기에' 라는 이 표현은 바로 '가까운 곳에' 라는 표현과 같은 단어 입니다.

가까운 곳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6개가 있었다 라고 말합니다.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과 유사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혼인 잔치의 핵심과 본질은 혼인 그 자체에 있지 

꽃치장을 얼마나 할 것인지, 그리고 음식을 어떻게 훌륭한 것으로 만들지 그것에 본질은 있지 않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기쁨과 행복에 본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핍된 혼인잔치 가까이에 있는 돌 항아리는 손씻는 용도 였을 뿐, 아무런 기쁨과 만족도 없이 동떨어진 돌 항아리 자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어쩌면 구원과 샬롬에 가까운 신자와 교회들이 무관하게 정결예식을 위해 동떨어져 있는 그런 돌 항아리로 보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례도 역시 결혼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세례 받은 자들의 회복과 구원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지금 배풀어지고 있는 이 논쟁은 그 기쁨과는 무관한 것이겠지요.

누구의 세례가 더 옳은 것이냐? 그리고 누구의 세례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가? 라고 하는 이런 논쟁도 사실 무의미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일들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사역은 사역 자체일 뿐 이지 목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교도 역시 설교일 뿐이지 목적일 수가 없겠지요.

본질을 이루어가기 위한 방법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사역 모두가 다 이렇게 살렘에 가까운, 더욱 가까운, 아니 장차 살렘이 되어질 그런 애논 곳 샘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최후는 마침내 곧 새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30절을 읽어봅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우리들에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라면 우리들의 삶은 사실상 어떠해도 상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이 신앙적 쇠하여짐은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의 가장 장엄한 자기고백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샬롬을 구하며 이렇게 세례의 사역을 하루하루 이어갈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주님이 흥 하시다면 나는 어떠 해도 좋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참된 자기 부인을 행한다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높여 질 것이오. 주님과 함께 영광으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에 사역을 베풀던 요한 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샬롬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영생의 샘을 나눠주는 자로 세례 사역에 동참 합니다.

문득 들어오는 인간적인 생각과, 오늘도 은연히 찾아오는 세속의 목소리를 단연히 거부하고,

그가 흥하기 위하여 나는 쇠하리라 는 거룩한 결단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성도님들의 삶 속에 이 놀라운 신비의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요한이 요약해서 말해 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하나님은 인정하겠는데

예수님은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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