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7.화 생명의 삶 이해영 목사
요한복음 2장에는 두가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의 혼인 잔치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시키는 그런 이야기가 이어져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의 이야기는 결핍하고 부족한 것을 매워 기쁨을 회복했다'라는 그러한 감격스러운 이야기고,
또 성전을 정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인가 분노 하신 주님께서 노끈을 채찍으로 만들어서 상을 엎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는 매우 긴장감이 감도는 그런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전혀 다른 두 그림이 요한복음 2장 안에 두 가지 이야기로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 자체를 말하는 것이오.
온 세상과 이 모든 인류의 두 지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또한 심판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제 우리 앞에 펼쳐질 2020년도에 새로운 삶은
단지 종교적인 그런 일상을 되풀이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아닌 정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죄와 사망을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함께, 승리를 이루는 이 한 해가 되기를 원하고,
또 그러한 선포가 오늘 주어지는 소중한 오늘의 말씀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건물 성전 시대는 지나고
예수 성전 시대가 열리다
요한복음 2장 13절에서 25절 말씀 입니다
13절을 다시 한번만 읽어 보겠습니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3년 동안 그렇게 이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요한복음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유월절을 맞아 성전에 오르셨다'라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13절이 그중에 하나이겠구요.
6장 4절과 11장 55절에서도 또 한번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맞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표현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표현이고요.
또 지금 세 번 언급한 이 표현들 중에 '유월절이 가깝다' 라는 표현이 모두 그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 그 중에 하나만 읽어보면 요한복음 6장 4절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또 요한복음 11장 55절에도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첫번째는 유대인의 유월절이 과연 맞느냐? 라는 표현입니다. 사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유월절은 본래 모세와 함께 온갖 중다한 잡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세상 만민의 유월절 온 세상에 유월절 이라야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 '유월절이 가깝다' 라는 표현도 물론 시기적으로 그냥 얼마든지 읽을 수 있겠지만
세번 모두 그런 표현이 있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 이 말씀을 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유월절은 어디쯤 있을까요?
저와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의 유월절은 얼마나 가까운 곳에 밑이 하고 있을까요?
혹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주변인으로만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윽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멀게만 있었던 가깝게로만 그렇게 머물러 있었던 우리들의 신앙이
이제 진정한 성전 하나님의 예루살렘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결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까이 나아갔더니 이런 장면이 펼쳐집니다.
14절부터 16절 입니다.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보통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제사하는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기보다는 '제사하는 집'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3절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공간복음 모두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르켜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제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사드리는 모든 것이 행위에 있는 의식적인 것을 있지않고, 기도와 같은 본질적인 것과 그 내용을 통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 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분노한 것은 이스라엘 성전에 기도만이 아닌 그들의 생활과 삶 전체가 기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요한복음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방식을 들을 수 있을 텐데 16절이 바로 그 구절이 되겠습니다. 읽어 봅니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라고 요한복음 만에 해석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그렇게 요한복음에 특별한 해석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스가랴서를 생각한 말씀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스가랴서 14장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나님의 성전에 가난한 사람이 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스가랴서를 자세히 보면 그 밑에 각주의 여기서 안한 사람 이라는 아이 표현을 '상인 이라는 뜻도 있음' 이라고 그렇게 아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성전에 '장사는 사람이 그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상인들이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스가랴서를 인용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인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에 가장 중요한 기준과 척도는 어쩌면 경제적인 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 여건 때문에 신앙 생활에 유우를 결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가거나 예배를 드리는 가능성에 유무도 우리들의 경제적인 이유와 목적과 중요한 어떤 사건들 때문에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를 또 기도를 하는 삶을 우리는 장사하는 이치에 따라서 그렇게 좌우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 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우리들의 마음의 정화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아주 쉽지 않은 경제적인 여건과 사업의 여건과 직장생활이 펼쳐지겠지만,
결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신앙 생활하는 그 모든 것들의 열쇠로 작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범사를 다스릴 수 있는 이 놀라운 성전정화에 하나님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 말씀은
무엇은 연상하게 하나요?
교회에서 개인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요?
19절 부터 21절까지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또 부활의 사건을 벌써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일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서 묘사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분명히 성전의 파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성취되는 것이겠죠.
반면에 '다시 일으키리라' 라는 새로운 성전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참된 성전이란 건물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시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성전은 제사하는 곳인데 예수님은 무엇을 가리켜 기도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어떤 건물이나 또 제사 드리는 어떤 행위와 행동속에서 그 본질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는 그 중심 속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전을 허무는 것은 심판을 가리키고
또 이 심판은 예수님의 몸에 대한 표현으로서 노끈을 채찍으로 만들어서 휘둘러 보고 계시는 장면을 우리들에게 연출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환전상들을 내쫓았던 것이지요.
아마도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내면 속에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에 붙잡혀 있음으로 인해서 진정한 성전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건물만 왕래하고 있는 우리들의 형식적인 신앙, 죽은 종교성을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경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새로운 새해가 밝아진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진정한 신앙생활에 성취가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연약한 세속의 것들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새성전이 돼서 새로운 신앙의 삶이 펼쳐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22절에 말씀을 읽어 봅니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 난 후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주의에서 봐야 할 것은요.
요한복음 2장 에서 두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는데,
오늘 두 번째 이야기의 결론이 22절이라면, 가나의 혼인잔치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11절 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라고 두 가지 모두가 다 믿음으로써 끝나고 있습니다
아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라는 것으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매듭짓고,
성전정화의 사건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는 말씀으로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믿음을 잘 생각해 보면 사실상 조금 다른 그런 믿음 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믿음은 예수님께서 아주 놀라운 기적을 베푸셔서 보여주셨던
그런 결과로써 나타난 믿음 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표적을 통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뒤에있는 성전 정화 사건은 사실상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잘 읽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사건을 볼 때에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그런 좀 어려운 내용 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들의 신앙도 이렇게 표적의 머물러서 우리들의 감정을 크게 동요 시켰던 그런 믿음으로 지난날 살아왔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또 부활을 묵상하면서 다시 참 성전이진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리라'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정말 멋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이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앙 여정을 통하여서 가나의 혼인잔치로써의 기쁨의 회복뿐만 아니라,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활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놀라운 성숙한 신앙으로 믿음으로 회복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두 이야기와 같이
우리들의 일생도 우리들의 삶에 자리도 이 세계도 가나의 혼인잔치요
또한 성전 정화의 사건 처럼 하나님 우리들의 모든 결핍을 회복시킬 뿐만 아니요.
우리들의 모든 부정함도 정하게 하시는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 모두가 만나게 하시고
그 역사 우리가 굳건히 믿음으로 새롭게 다가온 2020년 지난날의 신앙이 아닌
더욱 더 눈부신 부활의 신앙으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예수님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왜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셨나요?
내 편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지나치게 의지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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