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1. | 생명의 삶 | 임채영 목사
여러분 평안하셨죠?
저는 아현동에 있는 서부교회를 섬기고 있는 임채영 목사입니다.
우리가 매년 부활절을 지내죠.
그런데 아쉬운 것은 우리가 부활절을 보내자마자 부활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국경일에 기념식을 치르고 그 이듬해까지는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가 아닙니다.
픽션도 판타지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라고 해서 단순히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추억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매 주일이 부활절이어야 하고 매일이 부활절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절을 지내면서도 부활을 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말씀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10절에도 이러한 안타까움이 나오고 있습니다.
부활을 확증하는 빈 무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10절 말씀입니다.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
자 오늘 본문 첫 번째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그 돌아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시신의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는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니까 안식 후 첫날은 지금으로 하면 주일 아침이 되는 거죠.
새벽같이 막 달라 마리아가 가는데, 다른 복음서를 보면 다른 여인들도 함께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당시에는 무덤을 엄청난 큰 바위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그 큰 바위가 열리고 무덤 문이 열린 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너무 놀란 이 마리아가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가서 이것을 보고합니다. 2절을 보세요.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죠?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말도 안 된다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생전에 여러 번 말씀해 주셨음에도 부활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그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던 거죠.
그런데 그중 두 사람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3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 그렇게 우리들이 알려져 있죠. 그러면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요한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요한이에요.
베드로와 요한 이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자 즉시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달려가 보니까 정말로 예수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만 발견합니다. 6절 7절 보세요.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요한이 제자들 중 가장 젊은 제자였기에 달리기가 가장 빨라서 먼저 도착했지 않았을까?
제일 먼저 도착은 했는데 무덤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뭔가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살펴보니까 그제야 그도 따라 들어가서 보게 되죠.
들어가 보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쌓았던 세마포와 머리를 쌓았던 수건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개켜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세요.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무엇을 믿었다는 말일까요? 사흘 후에 이제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그런데 9절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러니까 8절에서 믿었다는 것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전한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말입니다.
그들은 마리아에 이어서 생생한 부활의 현장에 직접 도착해서요.
들어가서 그 현장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에 무엇 했죠? 10절을 보세요.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 제자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그때에 다른 제자들처럼 영적으로 어두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웠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 엄청난 주님의 부활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하면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 거죠.
계속 영적으로 어두워서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이 두 제자처럼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뒤에 우리가 있습니다. 곧 따를 겁니다.
그 첫 열매 대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볼 때에 이 부활은 옛날에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것이고 바로 우리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는 겁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이 부활의 은혜 앞에서 오늘을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거죠.
영생을 소유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부활의 능력을 힘입고 오늘도 부활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저희들을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오늘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주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고 주의 사람으로 살게 하셔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CGNTV > 생명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을 얻게 하는 순전한 믿음(요한복음 20:24~31)(20250313) (1) | 2025.03.13 |
---|---|
평강을 선포하신 부활의 주님(요한복음 20:11~23)(20250312) (0) | 2025.03.12 |
예수님을 장사 지낸 용기와 사랑(요한복음 19:31~42)(20250310) (0) | 2025.03.10 |
온전한 순종과 사명 완수(요한복음 19:23~30)(20250309) (1) | 2025.03.09 |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만왕의 왕(요한복음 19:14~22)(20250308) (0) | 2025.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