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 생명의 삶 | 김상수 목사
안녕하세요
대전 온누리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상수 목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으로 성전의 예배가 회복되는가 싶더니 잠시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유대인들은 다시 하나님께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죄악에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영적인 순결함을 강조하고 성전 안에 도비야를 쫓아내고 타락한 제사장을 갱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 나눌 말씀인 느헤미야 13장 1절에서 9절에 있는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단호한 결단
1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성전 예배가 회복되자 이 세상에 없는 거룩한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말씀의 회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나타난 암몬과 모압 사람과는 이스라엘이 하나 될 수 없다는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들의 영적인 무지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들이 은혜받은 말씀은 신명기 23장 3절에서 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명기 23:3~5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하나님은 왜 암몬과 모압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 하나님의 일을 돕지 않았고,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고용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공동체가 말씀을 몰랐을 때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과 통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자 자신들과 동화되어 살던 이방인들과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공존하던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자칫 경제적 손해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진리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유일 신앙과 언약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대가 제자가 되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돈과 명예와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식과 세상의 친구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환란과 고난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거룩이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왕궁 속에 살면서도 왕의 진미를 먹지 아니하기로 뜻을 정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영적인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1년 정도 떠나 있었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마도 총독으로서의 근무 기간이 다 끝나고 이것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와 봉헌식을 마치자 바사에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받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예루살렘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아십'이라는 성전의 제사장이 부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방 사람 도비아와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성벽 공사를 방해했던 도비아가 거룩한 성전의 방까지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나무라거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방 사람 도비야가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앞에 그 누구도 장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느헤미야는 그것을 보자마자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즉시 '도비야'를 내쫓고 이방인과 내통한 '엘리아십'을 성전 안에서 내쫓았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아십'으로 인해 거룩한 공동체가 다시 죄의 누룩 앞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의 누룩을 공동체 안에서 제거하지는 못할 망정, '도비야'가 재물과 십일조 곡물과 성전 기구 등을 두는 창고와 방 안에 이방인 도비야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낙태와 게으름과 우리의 안일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영적으로 민감한 느헤미야의 부재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제사장 '엘리아십'의 직권남용으로도 볼 수 있지만, 느헤미야는 이것을 공동체 전체의 죄악으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낭독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교육을 시켰지만, 인간 안에 있는 연약한 죄성으로 인해 다시 무너지는 것을 보며,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골방에 들어가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이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영적인 무가치함과 또 메시아를 더 바라보게 되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발 빠르게 대처를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유익이나 정치적인 계산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거룩한 순결을 지키고 사탄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안에도 '엘리아십'과 '도비야'와 같은 죄의 유혹과 시험에 자주 넘어지는 모습이 있지 않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혹시 내 안에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고자 하는 이중생활과 회색주의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더욱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믿음의 순결함을 잃어버리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안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우리를 붙잡아주셔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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