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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자에게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사도행전 9:1~9)(20230709)

2023.07.09.ㅣ생명의 삶 | 안광복 목사

 

박해자에게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

 

할렐루야 

청주상당교회를 섬기는 안광복 목사입니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예배드리시는 모든 시간과 현장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성령님의 기름, 부심의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을 부르십니다.

성경의 수많은 부르심의 장면 중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극적인 부르심의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울을 부르셔서 놀라운 주의 종으로 변화시키시는 이야기,

그의 회심 장면이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에 세 번이나 나오겠습니까?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그리고 그의 변화를 통해서 어떤 일들이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행전 9장 1절에서 9절의 말씀입니다. 

 

 

박해자에게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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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9장에 나타나는 사도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22장과 26장에 각각 또 한 번씩 언급이 되고 있죠.

사울 개인의 정말 충격적인 그런 회심 장면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그런 사건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예루살렘에서 다메세까지는 200km가 훨씬 넘어요.

그 먼 거리를 굳이 쫓아가서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피신하고 있을 크리안들을 붙잡아 오겠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다메색 다메색은 시리아의 수도죠. 다마스코스의 히브리식 발음인데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꽤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요세푸스 학자에 의하면 약 4만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했고요. 

한 30여 개가 넘는 회당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크리스찬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에 대한 굉장한 증오와 분노심을 가지고 있어요. 

여기서 여전히라는 이 단어는 사실 5절에 보면 '당신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주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박해하다 퍼스큐팅 여기 ing로 나오죠. 현재도 지금 박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나를 지금 현재도 박해하고 있다.'

과거에 어느 특별한 시점에 한두 번 아주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고 어렵게 뭔가를 사람들을 핍박하고 이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계속 박해하고 있는 중이다.

사도 바울의 이 마음, 사울에 갖고 있었던 이 분노와 적개심은 사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에요.

자기가 믿고 있는 율법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이교도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퍼져나가면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그 확신 속에서 굳이 그 먼 곳까지 가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고 그 교회를 완전히 그냥 파괴시키고자 하는 어떤 그런 그런 마음에서 그렇게 그가 다메세까지 지금 가고 있던 중이죠.

 

그곳에서 3절을 보니까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특별한 신비한 빛의 그는 휘감싸입니다. 

그리고 4절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땅에 엎드려져 들으면 소리가 있어 이러시되 빛이 있었고요. 

소리가 있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이죠. 

'나를 박해하느냐'

사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어요. 사울은 크리시안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당신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 하고 계시죠.

크리시안들과 한 몸이라는 것을 지금 상징적으로 가르쳐주고 계시는 거예요.

대답하되 주여 누구십니까? 

누구시니까?

당신이 누구십니까?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울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신인식, 신에 대한 지식, 율법에 대한 그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전혀 감지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당신이 누구십니까? 

이 질문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런 역설적으로 그런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22장 10절에 보면 내가 그러면 무엇을 하리이까?

'당신이 누구십니까? 또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을 여러분 잘 기억을 하십시오. 

'당신이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은 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질문이라면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는 것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굉장히 중요한 그런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두 가지 질문 앞에서 우리들은 항상 답을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당신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거에 따라서 거기에 걸맞는 사명과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면서 살 수 있게 되거든요. 

오늘 이 본문의 말씀 우리에게 주시는 굉장히 묵직한 울림이 있는 이 질문의 말씀을 여러분 마음속에 잘 새기시고 

앞으로 계속 펼쳐질 사울의 회심 사건 그 이후에 놀라운 그런 장면들 같이 한번 계속해서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를 심하게 모독하고 비판하는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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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세요.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사울에게 무엇을 해야 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굉장히 많은 관심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가는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 정확하게 분명하게 그렇게 캐치할 수 있을까?'

당연하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또렷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달라요. 

뒤에 나오겠지만 아나니아에게 주셨던 말씀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굉장히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가서 누구를 만나서 어느 집으로 들어가서 

그런데 지금 사울에게는요 그냥 좀 막연합니다. 구체적이지 않아요. 

시내로 들어가라 그리고 니가 행할 것을 네게 이을 자가 있을 거다. 

막연합니다. 

그리고 가봐야 알아요.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사울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영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럽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그런 거리 친밀한 관계에 기인하게 되겠죠.

후반부에 가서 또 살펴보겠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사울이 이제 일어나서 다의 색으로 들어갑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여러분 이 장면을 보십시오.

눈은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대요.

눈은 떴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때 사울이 느꼈을 그 절망감이라는 것은 어땠을까요?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의 충격을 우리는 직감할 수 있죠. 엿볼 수 있죠.

사흘 동안 보지 못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볼 수가 없었어요. 

근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것은 철저한 자신의 의지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것을 한 단면으로 얘기하죠.

눈은 멀쩡히 떴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면서 살아왔던 그런 사울의 모습이에요. 

사람의 손에 끌려서 담의 색으로 들어가죠 누군가에 의해서 끌려 들어갑니다. 

평생을 주도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갔던, 누군가를 끌고 다녔으면 다녔지 어디에 끌려 다닐 만한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끌려갑니다. 

크리스찬을 핍박하려던 자가 이제 그리스도의 그 권세 아래서 그가 굴복당하는 거예요. 

그가 거기에 완전히 붙들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생입니다.

 

보세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죠.

눈은 떴지만 사울처럼 제대로 된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있어요.

귀가 있지만 제대로 된 것을 듣지 못하죠. 

열심히 뭔가를 말을 잘해요. 

정말 기가 막힌 달변가야. 

그런데 엉뚱한 이야기만 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정말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쓸데없는 일에 바쁘게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그런 우리의 모습들은 혹시 없지 않았냐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울의 개인적인 어떤 회심 장면이지만,

우리의 삶의 길을 어떻게 나는 살아왔나?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십니다. 
전반부에 살펴봤던 것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나는 눈을 뜨면서 정말 제대로 된 것을 보면서 살아가는가?

말을 하되 정말 필요한 말들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인생을 바쁘고 분주하게 살지만,

내 개인적인 만족과 유익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그런 인생으로 살아가는가?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비춰보시고 이 말씀 앞에 순종하시면서

사울의 회심처럼 사울의 변화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주님과의 아름다운 변화

그런 놀라운 만남이 우리 안에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나를 언제, 어떻게 만나 주셨나요?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사울을 만나주셨던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도 찾아와 주셔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오늘도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옵소서.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거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방향을 향해 불필요한 열정을 쏟으며 살지 않도록 내 삶의 방향과 내용을 항상 지켜주시옵소서.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쓰임 받으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인생 여정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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