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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사도행전 4:23~37)(20230628)

2023.06.28.ㅣ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기도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

 

샬롬 

영화교회 윤광서 목사입니다.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막스는 그의 이론을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근거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초대교회의 유무상통한 모습과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자발적 은혜의 나눔인 반면에, 

공산주의는 권력에 의한 강제적 배분이기 때문이죠. 

그는 목사의 아들로서 본인도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반감으로 인해

초대교회의 자발적인 은혜의 나눔으로 강제적 나눔을 교묘하게 바꾸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이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념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모습이지만,

그것은 이 땅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경험으로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고 모습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4장 23절로 3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보겠습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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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나면서부터 못 걷던 사람을 고친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공회에 심문을 받았지만,

담대함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대답을 하자, 더 이상 그들을 잡아 놓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위협하고는 놓아줍니다. 

그렇게 노임을 받은 사도들은 동료들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인 24절로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은 바로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기도를 보면, 초대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성경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라는 설명에 이어, 

시편 2편 1절과 2절의 말씀을 성령으로 하신 말씀으로 소개하며,

시편 2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를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증거 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린 것처럼, 이제 그 위협은 초대 교회를 향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셨듯이, 

이제 교회와 주의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고,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교회에 나아갈 방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며 교회를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가 초대 교회와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 다시 한 번 그곳에 성령의 강력한 재가 있었고,
성령 충만한 그들은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전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만방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 말씀을 보면,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병 나음과 능력으로 가득한 표적의 사건을 원하는 기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절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사도들도 그렇게 기도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24절을 보겠습니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단지 하나님을 높여 부르는 의례적인 표현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의 대주제시며 창조주시라면, 우리가 취할 태도는 절대적인 순종뿐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바로 그런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전히 증거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

그런 사도들의 기도처럼 오늘 우리의 간구도 새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의 합심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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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절부터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서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된 초대 교회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의 믿음의 모습은 재물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한결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이렇게 했으니까,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재물을 나눕시다라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으니 아예 그럴 생각을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서로의 물건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니, 이렇게 합시다라고 합의하고 결단해서 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무리들이었고, 그들이 그 믿음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기에, 

이러한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진정한 사랑을 서로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권력에 의한 강제적인 나눔이 아닙니다. 은혜에 따른 자발적인 섬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기 때문이었죠.
즉, 부활 신앙을 갖게 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 세상의 가치보다 부활이라는 더 큰 소망을 분명히 가졌기에 이러한 나눔이 가능했던 겁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부활에 대한 큰 소망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이 팔아서 그 판 것을 사도들에게 가져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33절로 35절 말씀을 보면, 당시 밭과 집이 있는 사람은 상당히 부유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그들 중 한 사람이 소개가 됐는데, 바로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으로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죠.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바나바처럼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본문을 함께 묵상하면서 '있는 것들을 다 팔아 공동체에 나누십시오'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혹 그런 말을 한다면, 믿음과 은혜를 강조한다고 하면서 또 다른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들의 복음 증거로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곡해(曲解)하여, 말씀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증거로 재산을 교회 앞에 또는 목사에게 가져와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마는, 은혜를 얻은 자들이 자기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사도 개인 앞에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증거 한 말씀 앞에 삶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깨달은 성도는 자신의 소유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그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성도의 모습은 우리의 주권자이시자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얻은 소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겨우 입으로만 감사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고백할지라도, 자기가 가진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고, 연약한 현실입니다. 

끊임없이 내 것만 더 해달라고 주장하며, 쌓고 또 쌓으려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임을 겸손히 인정하며, 오직 주님 앞에 이 허물과 죄를 아룀으로 사함 받고 날마다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나눔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로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여 세상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피로를 돌아보아 채워주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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