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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사도행전 4:1~12)(20230626)

2023.06.26.ㅣ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

 

샬롬

영화 교회를 섬기는 윤광서 목사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이 누리고 싶어 하는 성취와 만족은 아닙니다. 

만약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어떤 사람이 한 목사님의 기도로 일어나 걷게 되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겠다고 몰려들 것입니다. 

또한 그 목사님은 대단한 사람이 된 줄로 모두가 여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결과를 기대하며 또 다른 기적을 바랄 것입니다. 

이런 환상을 꿈꾸며 남다른 능력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주님의 주권 아래에 있으며, 오직 영광을 받으실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4장 1절로 12절까지 말씀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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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장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 걷게 된 치유의 기적과,

그 놀라운 소식을 듣고 몰려온 이들에게 선포한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의 여파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제자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중에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이 남자만 5천 명이라고 하니, 

여자들이나 어린이들, 노인들까지 계산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만약 오늘날 돌풍과도 같은 이런 영적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사도들의 이름은 아주 높게 올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아주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갈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영접한 뒤에, 

그들에게는 뜻밖의 저항이 닥쳐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지만, 정작 사도들은 붙잡혀 갇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등장을 합니다.

제사장들이란 제사와 예배, 그리고 성전 관리를 주관하는 이들이고,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치안 등을 담당하는 경비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지주이자 귀족 계급으로, 제사장 직분을 가진 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사도를 싫어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 부활하셨다는 가르침을 사도들이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교회 권력자들로서, 모든 예배를 주관하고 영적 영향력을 독점하던 종교 권력층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종교적인 제의나 집회를 갖는 것은 자기들만의 소관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시에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전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것을 보고 

그 예수님을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처럼, 

지금 똑같은 일을 제자들에게도 행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에게는 부활도, 천국도 관심밖이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실질적인 권세를 쥐고 있던 이 땅의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는데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의 유대 관계만을 중요하게 여겼고, 

어떻게든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줄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밖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은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 파급력이 다시 거세게 일어나고 있으려니, 사도들을 붙잡아 가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집착하려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오,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의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얻지 못하도록 합니다.

가장 영적으로 바로 서 있어야 했을 지도자들이

복음 전파의 귀한 역사에 가장 큰 반대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활 신앙과 능력을 제자들이 전파하지 못하도록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둡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임을 증거 합니다. 

아무리 핍박을 가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생명력은 결코 가로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 옥에 갇힌 제자들의 경우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인해 고난에 처하고 어려움을 만난다고 해도, 

복음만은 결코 쇠하지 않고 그 능력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복음 전도자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누구보다 평안하게 해주셔야 맞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과 계획을 지켜내기 위해 사도들을 가둔 자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삶의 형통이 있다는 약속은 오히려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초청이 있을 뿐이지요. 

진정한 평화는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을 사두개인이 싫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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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에게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질문을 합니다.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 질문은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근원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이라는 표현을 반복해 사용하면서 사도들의 기적의 근원에 대해 의혹을 드러냅니다.

 

신명기 13장 1절로 3절 말씀에 따르면 

여호와 이 외에 다른 신의 이름으로도 이적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들을 청종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즉 대제사장들은 사도들이 행한 기적을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악신에 근거한 기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단순히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성전에 정치적, 물리적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경위를 따져 벌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긴 질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예수님 때에도 일어났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이권만을 지키려고 했던 공해원 무리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이적을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와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8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합니다.

베드로는 매우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 처했지만,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담대히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담대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2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이 예수님의 예언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성령으로 충만한 이 상태는,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당시 최고 권력자들 앞에서 마땅한 대답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베드로가 한 답변의 내용은 그 전날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한 것과 동일합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사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가르치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받은 질문에 대해 다시 한번 대답합니다.

걷지 못하던 자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신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가 곧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그리스도이심을 밝힙니다. 

 

베드로는 11절을 통해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을 비유하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음을 재차 증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절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을 허락하시는 유일한 이름임을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발언은 공회 앞에서의 변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온갖 말들 속에서, 특별히 종교 다원주의적이며 거짓되고 악한 구원관이 난무하는 이 세대에,

오늘 사는 우리 모두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임을 높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을 다그치는 유대 지도자들과 이 땅에 사는 모든 예수 이름 모른 채 죽어가는 자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까? 

오직 주님의 마음과 같은 소망을 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베드로가 전한 구원의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언제나 어디서나 
강하고 담대하게 
오직 한 분 구원이신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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