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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의 날에 임하는 괴로움과 외로움(예레미야애가 1:12~17)(20230605)

2023.06.05.ㅣ생명의 삶 | 도육환 목사 

 

진노의 날에 임하는 괴로움과 외로움

 

할렐루야 

영정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도육한 목사입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이 여러분의 발 앞에 등불이 되게 하셔서 

갈 길을 비추시고 바른 선택과 결정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공감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요? 

대체로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공감 능력이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드라마 속 설정된 이야기에도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함께 울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예레미야애가는 공감 능력이 없이 묵상하기 쉽지 않은 본문인 것 같습니다.

시대적 배경에서 오늘 우리와 2,600년의 간격이 있고, 지리적 배경도, 국가적 상황도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선지자의 마음과 예루살렘의 상황을 공감할 수만 있다면,

그 능력으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아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간격과 차이를 넘어 예루살렘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애가 1장 12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진노의 날에 임하는 괴로움과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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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어제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를 묵상할 때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고 있는 선지자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면,

오늘 본문은 처참하게 짓밟힌 처녀 시온 예루살렘의 입장에 서서 슬픈 노래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슬픔에 빠진 여인 예루살렘이 자신을 보고 있는 타자들에게 묻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우리의 재난이 너희들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이 질문은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나와 예루살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한 상황을 보거든 너희에게 교훈을 삼으라. 

우리가 당한 이 심판의 끔찍함을 보거든 이것이 바로 너희에게도 임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나와 우리 가정은? 그리고 우리의 조국은 이 일에 상관이 없는 안전지대에 있는가를 심각하게 물어보게 됩니다.

우리 중 누가 우리의 죄악은 예루살렘의 죄보다는 더 가볍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코 마음 편히 대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우리의 허물과 죄성이 낱낱이 다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도시와 이 땅,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심판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깨끗한지 물으면 대답에 자신이 없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음란하고 타락했으며, 도덕적 기준조차 없는 상태로 저마다 자신에게 옳은 대로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절대적 표준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버리고, 적당히 세속주의와 인본주의를 용납하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알기에, 오늘 본문은 더욱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난 중에 슬픈 여인 예루살렘이 또 묻습니다.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이런 재앙보다 더한 경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당한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네 가지 은유로 설명해 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심판의 불로 뼛속까지 타는 고통을 받았고, 

원수들이 치는 그 그물에 걸려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죄악의 멍에에 짓눌려 곤고하게 되었고,

마치 술틀 안에서 포도가 으깨지는 것 같이 모든 것이 다 부서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약탈당하고 불살라졌으며, 

그 자녀들은 손과 발이 사슬에 묶인 채 노의 멍에를 메고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처녀 시온은 짓밟혔고, 처절하게 유린당했으며,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술틀에서 포도주가 으깨어질 때 붉은 포도즙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은 이와 같이 많은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예루살렘을 짓밟은 바벨론 뒤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이토록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린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주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방의 막대기를 들어 그 자녀를 때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의 모든 군대를 무용지물로 만드시고, 

미래와 소망이 되어야 할 청년들을 이렇게 부으시다니 예루살렘은 참으로 충격받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죄 없지 않은 것 알고 있었으니 징계가 있을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끔찍한 심판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죄의 결과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죄 삯은 사망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길이 참으심 때문이지, 내 삶에 문제가 없거나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우리의 삶을 의로우신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확대경을 가지고 우리의 얼굴에 잡티를 찾아내는 것 같이, 우리의 마음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죄의 뿌리는 없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고 회개하고 제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고, 이 나라의 민족, 그리고 우리 가정의 살 길인 줄 믿습니다.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고 늘 깨어서 경계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한 자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이 겪은 고통은 어느 정도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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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슬픈 여인 예루살렘의 눈물과 탄식은 거칠 줄 모릅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한 것도 슬픈 일이지만, 정작 그 원수들의 무리로부터 보호해 주셔야 할 하나님이 심판의 막대기로 이방 바벨론을 들어서 쓰셨다는 것이 더 슬펐을 겁니다. 1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이 재앙을 만나 슬픔을 토로하고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어 하는,

그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줄 알았던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매질하셨다. 매질을 명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디로 마음 둘 곳이 있겠습니까?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시온이 두 손을 펴 도움을 구하지만 위로할 자도 없고, 함께 공감하며 아파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다 합니다.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철저히 홀로 남았고, 누구도 내 편이 없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만큼 서럽고 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이때의 절망스러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예루살렘도, 혹 우리 주변에도 이같이 외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루살렘만 이렇게 버림받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앞에 이 모든 수치와 고통, 외로움과 버림을 함께 당하셨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하고, 당신의 이름도 영광 받으실 수 있는 길이 있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건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이 친히 이방인들의 조롱거리로 자신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너질 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하나님도 함께 무너지고 계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정결한 신부로 다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게 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기꺼이 망가지기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받으시며,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자로 돌아가신 것과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군단이 넘는 하늘 군대를 동원하실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무능한 것처럼,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허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스스로 갈보리를 오셨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부르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혹 여러분에게 

여전히 고통과 환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당하는 이 모든 고난을 누구보다 고통스러워 하시며, 

여전히 지금도 십자가의 아픔을 함께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권세와 위험의 자리에서 명령하거나 그 권세로 모든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파하는 그 자리에 함께 낮아지시고, 함께 버림받기도 하시고, 함께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당한 슬픔과 아픔 중에 하나님 한 분 외에 의지할 자가 없음을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 우리로 배우게 하십니다. 

지금 힘겨운 한숨을 내쉬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이는, 그러나 하나님의 밀도 있는 손이 함께하는 

그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통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한 분 더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픔과 슬픔 가운데 있을 때 나는 누구에게 위로받으려 하나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무거운 침묵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잠잠히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합니다. 
믿음으로 주를 붙들고 승리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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