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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현장이 된 아버지 죽음과 장례 (창세기 35:16~29)(20221016)

2022.10.16. | 생명의 삶 | 서정오 목사

 

화해의 현장이 된 아버지 죽음과 장례

 

샬롬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도 평안하셨는지요?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현재는 CGN TV 후원 행사 기간입니다.
CGN TV가 펼쳐가는 한계 없는 선교는 함께하시는 여러분의 후원으로만 이루어집니다.
CGN TV가 계속해서 도전하고 미디어 선교의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경험들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출생과 죽음일 것입니다.

출생은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죽음은 그 종착력인 셈입니다. 

어떤 이의 출생은 온 세상의 비극이 되지만, 어떤 이의 죽음은 온 세상의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출생과 그리고 나의 죽음이 내 뒤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의 본문 말씀 창세기 35장 16절로부터 29절 함께 읽으면서 이 주제에 대하여 함께 묵상해 봅니다. 

 

 

화해의 현장이 된 아버지 죽음과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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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16절부터 20절까지 제가 봉독 합니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라헬'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에게 사랑을 참 많이 받으면서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단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면 자기 언니와는 달리 아들을 낳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셉 하나 겨우 낳아놓고 그다음에 둘째 낳기를 그렇게 원했지만,

그게 오랜 세월 동안 낳지 못하다가 드디어 둘째를 낳게 된 겁니다.

그토록 간절했던 두 번째 아들을 낳다가 그는 기력의 쇠하여서 그만 숨을 거두어 갑니다.

낳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이름 지었습니다. 

'베노니' 불행의 아들이라는 뜻이죠.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이별해야만 하는 아들, 평생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하는 그 아들을 생각하면서 아마 '불행의 아들'이라고 이름 지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이름을 당장 바꿔버립니다. 

'베노니'가 아니라 '베냐민'이라고 바꿉니다.

'베냐민'이란 '행복의 아들'이라는 뜻이죠.

왜 그 이름을 그렇게 아주 정면으로 반대로 바꿨을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이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는, 엄마의 목숨의 대가로 자신이 태어난 아들은 평생 자신의 불행의 씨앗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놓고 생각해 볼 때 그 이름은 '베노니'가 아니라 '베냐민'이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의 마침표 완성을 이룬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22절 후반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한마디로 말해서 베냐민이 없었더라면 야곱의 아들은 11명이었고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은 11 집합밖에는 안 됐을 것입니다.  즉 12라고 하는 완전수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지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역경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일이 잘 되면 한없이 기뻐하지만, 그저 잘 안 되면 쉽게 절망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들은 너무 쉽게 교만해지고 쉽게 절망하고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사는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머리로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5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이제 다 끝났다고' 그러지만 하나님은 '아니 이제 시작이야'

우리는 '다 막혔어 갈 길 없어' 그럴 때 하나님은  '아니 갈 길은 아직도 엄청나게 많단다.' 말씀하십니다. 
내 좁은 논리에 매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 길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죽음과 같은 애통한 현실에서도 내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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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을 읽어봅니다.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베들램 에브라에서 아내의 죽음을 통해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얻은 야곱은 드디어 조상들의 땅 '기럇 아르바 마므레'로 가서 아버지 이삭을 섬기게 됩니다. 

이 '기럇아르바 마므레'는 바로 조부 할아버지 아브라함 이 이삭이 살던 조상들의 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생인 야곱이 형인 에서가 물려받아야 할 조상들의 땅을 물려받고 대를 이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예언했던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장자의 명분을 사모하고 그리고 열망했던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었던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요즘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갈망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보이는 것들입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겼던 에서처럼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는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기던 야곱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땅, 영원한 땅, 믿음에 하나님이 복 주시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가 하면 28절, 29절은 180세에 죽은 아버지 이삭의 장례식에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려놓고 있음을 봅니다.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 장면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이삭의 시신 앞에 이제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함께 서 있습니다.

창세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야곱이 형 에서에게 미움을 받고 외삼촌 댁으로 도망갔던 이후에

이렇게 삼부자가 함께 있었던 장면을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셈이죠. 

그러니까 에서가 야곱을 미워해서 죽이기로 작정했던 그 순간 이후에 얍복 강가에서 에서와 야곱이 화해는 했지만 함께 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임종의 자리에 장례를 치르면서 형과 아들은 화해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버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천국 영생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죽을 때에는 그렇게 우리가 열망하고 바라던 돈 권력 명예 인기 다 놔버리고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형과 동생이 화해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어가신 십자가 위에 예수님 앞에서 원수도 없고 미움도 없어야 합니다.

사랑하십시다. 위로하십시다. 그리고 용서하십시다. 함께 살아가십시다.

 

야곱이 헤브론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생각보다 높은 생각을 하시고 우리 길보다 더 높은 길 가시는 하나님
우리가 눈 앞의 현실에 너무 쉽게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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