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4. | 생명의 삶 | 윤길중 목사
사랑하는 QT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부천 온누리 교회 윤길중 목사입니다.
오늘도 말씀 묵상을 통해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부적절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안의 여정을 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묵상할 말씀은 창세기 34장 1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폭력적인 아들들, 두려워하는 야곱
18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
하몰과 아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의 할례 제안을 수락합니다.
세겜 족속의 추장인 세겜의 할례 제안 수락은 부족 전체의 수락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19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그 이유는 19절에 보면 그는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이여서 결정권을 갖고 있었고, 디나를 연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논의와 의결을 위한 성읍의 성문에서 하물과 세겜은 성읍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면적인 이유인 결혼보다도 표면적인 이유인 물질적인 수익과 보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1절에 보면 자신들의 땅이 넓어 야곱 족속 모두를 수용할 수 있고 야곱 족속과 통혼을 하여서 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그러려면 부득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세겜의 속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23절 읽겠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세겜은 야곱의 가축과 재산을 탐내고 있습니다.
세겜 성읍 사람들 모두 야곱의 가축과 재산을 탐내고 있어서 동의를 하게 됩니다.
이로 보면 하몰과 세겜은 참으로 탐욕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강제로 한 소녀의 인생을 짓밟았고, 결혼을 빌미로 야곱의 가족들을 흡수하려는 야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성읍 사람들도 모두 이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4절에 보면 드디어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할례를 받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식인 거룩한 할례를 타민족을 속이고 살육하는 거짓된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경건한 행동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지 세겜 사람들은 전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선택과 결정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그리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지 우리는 그들의 이기적인 선택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신앙은 경건하게 우리의 인생을 안전하고 견고하게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만들지만 겉모양만 있는 신앙인의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들의 잘못된 선택, 위험한 결정들이 얼마나 온 족속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지 그들의 결정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의 선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내 뜻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뜻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그것이 가장 견고한 삶일 줄로 믿습니다.
25절에 보면 세겜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은 지 3일째가 되었습니다.
돌칼로 포피를 베어 꿰매었으니 아직 아물지 않은 아픈 상태입니다.
할례 받은 자리에서 피가 났을 것입니다.
3일째란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포경 수술은 생식기를 덮고 있는 포피를 자르고 다시 꿰매고 아무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3일로는 좀 부족합니다.
이 수술을 받아본 많은 남자분들이 동일하게 동감하실 겁니다.
걷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그러니 할례를 받은 세겜 사람들의 전투력은 무방비 상태였을 것입니다.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시므온과 레위가 매우 폭력적으로 사납게 나옵니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디나와 친남매 지간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디나 구출 작전이 목표였지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갖고 가서 성을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다 살육을 해버립니다.
하물과 추장 세겜도 죽이고 마침내 디나를 구출해냅니다.
27절에 보면은 잠잠히 있던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에 가서 재산과 가축들을 노략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빼앗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광분하여 매우 과잉으로 행동하는 까닭은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것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더럽힌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34장은 이 모든 죄가 다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세겜이 디나를 성폭행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거짓 협상을 하고 살인을 하고 강도 짓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의 축복장이 나오는데요.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 야곱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49장 5절에서 7절까지 야곱의 저주가 나오는데요.
창세기 49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 시므온과 레위가 저주를 받은 이유는 34장에서 세겜 사람들을 살육한 행위 때문입니다.
이들의 폭력성은 누이로 인한 일시적인 것 같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목축을 하는 목동이 지팡이와 막대기로도 충분한데 평소에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아무리 할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세겜 전사들을 일시에 몰살시킬 만큼 칼을 잘 다룬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내재된 폭력성과 잔인성이 디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꾹꾹 눌려져 있는 내 안의 죄성을 성령의 빛 아래에서 해결 받지 못하면
언젠가는 모두 분노로 폭발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드러난 겉사람보다 감춰진 속 사람이 우리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범위도 훨씬 넓고 깊습니다.
시몽과 레위는 분노하는 아버지를 향해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핑계를 대는 모습을 봅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이렇게 항변하는데요.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방어기제 우리를 항변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고
치료하고 회복할 그러한 기회를 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죄성, 무의식, 우리 안에 그 죄된 그림자들을 그대로 인정할 때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30절에 보면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는데요.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른 번역에 보면 나는 추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즉 평판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런 뜻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살생, 야곱의 아들들의 약탈과 노략질로 인해서 가나안 족속의 분노와 복수의 대상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 아들들에게 매우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QT 가족 여러분 자녀들로 인해 고통당하는 야곱의 문제는
자녀들의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하는 이 문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야곱 전 가족의 생사와 명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자녀 때문에 자신이 리더로서 이끌고 있는 구성원들 때문에 때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가장 리더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섭니다.
하나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청소년 전문가라 할지라도 집에 있는 청소년 자녀 하나를 다루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 앞에 서면 부모님들은 모두 왜소해집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의 극단은 이 모든 일어난 일이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고 낙심 가운데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는요. 왜곡된 자아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부추기고 그러한 부정적 생각을 증폭시켜 버립니다.
자꾸 생각하면 정말 나 때문인 것 같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기정사실이 됩니다.
이럴 때 이것을 믿으면 안 됩니다. 가짜 감정입니다.
이러한 가짜 감정에 사로잡히면 잘못된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나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일어난 일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사방이 막혀버린 것 같을 때,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해결하려고 하지도 말고 나 때문이라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리저리 생각해도 아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때,
여호사밧 왕처럼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요.
하나님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정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모든 것을 정돈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왜 좋습니까?
이러한 체험들을 한 많은 신앙에 선배님들의 넉넉한 나눔을 통해서 위로도 얻고 또 확신도 얻고 소망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여러분 사랑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신실하게 여러분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바라보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을 보면서 분노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내면에 내재된 분노와 폭력성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되지 말게 하시고,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잠재된 죄성을 발견하게 하시고, 내면의 그림자를 알아채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전 인격이 통합되고 치유되어 성화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 주님을 담기 원합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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