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2. | 생명의 삶 | 임채영 목사
오늘이 3월에 둘째 날 3월 2일 수요일입니다.
오늘이 교회력으로로 따지면 재 수요일 그래서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준비하면서 이 40일 동안을
그래도 좀 더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 주신 주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며 그 뒤를 따라가는,
거룩한 기간으로 정하고 저희들이 지키고 있죠.
오늘도 시작해서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러한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서울 아연동에 있는 서부 교회를 섬기고 있는 임채영 목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려고 하는 말씀은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7 절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품성, 겸손함과 순수함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우리 예수님은 이야기꾼 이셨던 거 같아요.
아주 어려운 주제들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십니다.
오늘 이야기에도 두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죠.
먼저 바리새인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 그리고 그들의 율법의 전통을 강조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지요.
반면에 세리가 또 등장하는데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쳤고,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상당 부분을 자기 주머니에 채웠던 사람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죄인의 대명사고 매국노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좋은 사람인지, 누가 나쁜 사람인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미 다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그 당시에 청중들에게 충격적인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9절을 보겠습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가 말씀된 대상, 그 대상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자기를 귀히 여긴다' 이것은 죄가 아니죠.
그러나 자기만 귀히 여기는 것, 이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이어진 10절을 보세요.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두 사람이,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거예요.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입니다.
자 그런데 그다음에 어떻게 전개될까요? 11절을 봅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는데 이 기도하던 위치를 보세요.
세리들과 따로 자기가 기도하는 자리조차 구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두 번씩 반복되어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같지 아니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나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다릅니다. 나는 세리와도 다릅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이 세리들을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교만이 아닐까요?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혹시 우리에게도 이런 교만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12절도 보세요.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1절부터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있어요.
바로 '나'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상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원문에는 훨씬 더 많은 '나'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나는 감사합니다.
나는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이 죄인이 주님 앞에 왔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이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될 이 기도에 주어가 나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요.
아무리 기도해도 안 변해요.
그것은 기도가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 속에서 내 속에 있는 부조리, 내가 숨기고 있었던 상처들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와 긍휼을 구할 때
그때 하나님의 회복과 치료의 손길이 임하게 되죠.
그러면 당연히 그 사람 속에는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없는 사람은요.
기도하면서도 자기를 숨기고 있는 거예요.
아니 자기를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조차 교만했던 사람들
오늘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자 그럼 이제 이 교만의 결과를 보겠습니다. 14절 상반 절을 볼까요?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성경은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세리는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13절 보세요.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자기의 죄인 됨을 인지 했지요.
그 죄를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 제가 주님만 의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세우는 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바로 거기에 의롭다 하심이 있는 겁니다.
여기에 복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를 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람,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했던 사람, 하나님은 그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교만한 사람은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
바로 이 세리에 자리에 서서 이런 기도를 해야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세리에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14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정말 필요한 게 이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겸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해야 될까요?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사람들 앞에서 그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했지요.
그래서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자, 더러운 자들을 보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위인 줄 내세웠죠.
그런데 세리는 자신이 지금 누구 앞에 있는 지를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 있는 자신을 보았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본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 앞에 있는 가를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많은 역전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낮추면 높아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보세요.
그분은 놀라운 능력이나 권세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하늘에서 땅에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그분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쓸데없는 것으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려는 순간
나에게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더욱더 낮은 자리로 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묵묵히 주어진 분량의 삶을 살아내며 말씀으로 세워가게 하옵소서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길에서도
스스로 의로운 자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빈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내어 놓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유일한 우리의 소망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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