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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신 창조주가 긍휼의 구원자심을 잊은 충고 (욥기 35:1~16)

2021.12.16.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높으신 창조주가 긍휼의 구원자심을 잊은 충고

 

평안하십니까?
영화 교회의 윤광서 목사입니다.
어리석고 우둔한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주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들을 수 있도록 들려주시는 것이죠.

게시라는 말은 감춰졌던 것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허락하심으로 보고, 듣고, 깨달아 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밝은 빛으로 비추어 주실 때 우리는 밝히 보고 확실한 깨달음 가운데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욥기 35장 1절에서 16절까지 말씀을 함께 묵상하시겠습니다.

 

 

높으신 창조주가 긍휼의 구원자심을 잊은 충고


욥기 35장 1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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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 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5 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 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주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가운데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 인생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보이는 어떤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일종의 주도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엘리후의 눈에는 에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엘리후는 이번에도 이 했던 말을 검증하려고 합니다.

2 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이전에 몇 차례에 걸쳐 이 주장한 무고함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하신다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아가 이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고,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하셨다며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뻐해도 무익하며, 죄를 범하지 않아도 무엇이 유익한가? 라며 항변한 바도 있습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은 하나님이 변덕스러우시기 때문에 인간이 의로운 삶을 산다 할지라도 무익하고, 이 죄를 짓든지 말든지 하나님에게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후에 따르면 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다루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며 하나님의 이 땅에서 공의를 행하시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변론하는 주장을 펴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거처로 여겨지는 하늘과 높이 뜬 구름을 예로 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구별됨을 보여주는 은유이기도 합니다.
엘리후는 인간의 의로움이나 범죄가 하나님께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나 영향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여기서 엘리바스에 대해 펼쳤던 마지막 변론에 한 국면인 하나님은 의 의로 말미암아 얻는 이익이 전혀 없다는 22장 2절로 3절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욥기 22:2~3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려 하지 않고 극심한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시선으로 주님을 보려고 한다면 잘못된 판단과 오류뿐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의 의와 선행에 어째서 응답하지 않으신지 언제쯤 합당한 보상을 주시는지 기다린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행동은 없을 것입니다.
내 시선과 생각이 기준 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이끄심 앞에 우리의 시선과 중심이 고정될 수 있도록 성령에 도우심을 소망하십시오.

 

높으신 하나님은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어떻게 대해 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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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향한 엘리후의 말은 논리적이고 신앙적인 말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의롭다고 주장하는 이 더 교만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 대한 엘리후에 분노는 정당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을 문제는 아닙니다. 9절로 10절 말씀을 보면

9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재앙으로 고통하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을 빚대어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맞지만, 그전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겸손한 마음으로 찾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 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깊이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두고자 애써야 할 것이겠습니다.

 

물론 이런 자세는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고통 중에 있다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닥친 재앙의 이유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점이 엘리후의 눈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은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억울함이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어디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탄신만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처럼 자기 문제에 갇혀 답답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욥기의 이야기는 복 받기에 가장 합당해 보이는 완벽에 가까운 한 인간이 오히려 실패와 몰락을 겪게 되지만,

그의 회복 역시 오직 주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일깨워 주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반응을 보며 그를 비난하고 책망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이 아닌 자기중심의 종교성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어리석고 연약한 인생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12절로 13절에서도

12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하는 말씀 가운데에서 잦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도 역시 우리가 쉽게 말하고 듣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엘리후는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은 부르짖음을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않으시며 돌아보지도 않으신다는 것이죠.
이런 생각이 많은 이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하며,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먼저 깨끗하게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인생 사이에 있는 죄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회개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를 직시했다면 그 결과로 심판에 놓일 자 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14절에서

14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의 말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을 순전하게 기다렸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말처럼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기다렸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다리면 헛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납득하게 하시려고 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온전하여지게 하시려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사랑을 깨달아 갈 때 가장 큰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통으로 부르짖는 이의 외침을 들을 때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할까요?

 

하나님 아버지
제 생각과 의에 사로잡혀 주님을 원망하거나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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