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4.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평안하십니까?
영화 교회의 윤광서 목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복된 하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수고로도 얻을 수 없고, 돈과 권력으로도 만들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생명의 은혜 가운데에 주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나의 생각 혹은 세상의 풍조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함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은 욥기 34장 1절로 20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창조주의 절대 주권
욥기 34장 1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16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18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20 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욥이라는 사람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고난 받지 않아도 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신앙을 기준으로 고난을 받을 자와 받지 않아도 될 자를 분류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과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도 이런 시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고난과 무관하다고 변증 하고, 죄의 결과로 닥친 고난임을 입증하려고 욥과 친구들은 논쟁을 거듭했던 것이죠.
엘리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지만, 아무 보람이 없다는 욥의 말에 격분합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의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욥은 온데간데없고 불평뿐만 남아 있는 듯합니다.
이처럼 욥을 책망하는 엘리후의 말도 결국 엘리후의 정의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17절에 나오는 엘리후의 말을 보면
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보면 엘리후도 욥의 고난을 죄로 인한 것으로 보고 있고 죄에 대한 징벌로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엘리후에 결정적인 오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죄에 대한 징벌로 나타난다는 것이라면 현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이해로 규정하거나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간과하고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려는 것이 크나큰 문제요 불신앙의 중대한 원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겠습니다.
예레미아 33장 15절로 16절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33
1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고 선포합니다.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와 이 땅의 정의와 공의를 실행한다는 것이 선지자의 예언이고,
이 예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오직 공의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정의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부정과 불의가 모든 영역에 만연하지 않습니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부분까지 거짓과 불의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세상은 그야말로 죄 그 자체라는 점이 드러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그 죄가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마침내 확증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시는 것이며, 의롭게 하시면 그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나의 무지와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오해하거나 의심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엘리후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10절로 12절 말씀을 보면 그의 생각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엘리후의 선언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비치는 현실 세계의 온갖 악하고 더러운 악행과 불의는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공의가 존재하느냐?' 하는 항변에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혹 욥과 같은 고난을 겪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과연 고백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의심 없이 동일한 고백을 아뢸 수는 있는 것입니까? 엘리후는 14절과 15절에서 말합니다.
14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육체는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왕이나 고관대작도 거지나 중병에 고통하는 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어떠한 사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인생은 누구도 서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받아야 할 자 드릴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잣대로 당신은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공의로 임하셔서 심판하신다면, 모든 죄인과 불의한 자들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공의를 실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름 앞에서 구원하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통치하심이며 주권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죄에 대한 합당한 결과 즉, 공의로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의로우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선포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랑의 능력을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쏟으십니다.
사람은 외적인 것으로 서로를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중심을 보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구원 얻는 감격을 누리게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만큼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은 없습니다.
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신실함으로 나아가십시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저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완전한 의로 저희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총 앞에 겸손한 고백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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