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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 심판자의 전지하심 (욥기 34:21~37)

2021.12.15.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하나님의 정의, 심판자의 전지하심

 

평안하십니까?
영화 교회 윤광서 목사입니다.
요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CCTV라고 불리는 카메라입니다.
보통 한 사람이 하루에 100대 이상의 카메라 앞을 지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생활이나 개인정보를 걱정하기도 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카메라가 닫지 않는 사각지대가 훨씬 더 많이 있어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는 사각지대란 없습니다.
악인의 숨을곳도 없고 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제안이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오늘은 욥기 34장 21절로 37절까지의 말씀을 묵상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심판자의 전지 하심


욥기 34장 21절에서 37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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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22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25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26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27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30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의 길을 주목하시고, 그 모든 걸음을 살피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 모든 길을 지켜보시면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며,

또 한 가지는 주님이 인생의 모든 걸음을 아시기에 이것으로 주님이 판단하실 기준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감찰은 부당한 감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피신다는 사실은 평안과 함께 신실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라틴어이죠.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하는 피조물이 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 은혜요 복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 그리고 세상 앞에 잘 보이고 성공하기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사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요구하시는 자세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뜻입니다.

 

은 그가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감시하는 분으로 여기어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하나님의 감찰은 가장 귀한 통치행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임을 일깨워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감시자가 아니라 의로운 보호자 이심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가 병들고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어려움을 만났을 때나 주님의 보호하심을 오해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감찰자 이 시기에 누군가를 심판하시기 위해 그를 데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악한자를 사람의 목전에서 꺾으시고 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의로운 일이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심으로 그분의 다스리심을 나타내십니다.
그 목적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악에서 떠나고 신실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9절을 보면, 때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며 얼굴을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특별히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신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누가 그분을 정죄할 수 있으며, 그분이 얼굴을 감추실 때 누가 감히 억지로 그분을 나타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하시고 당신의 뜻을 그 고유한 방법으로 나타내심을 의심할 바 없고, 그분의 주권을 부정하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걸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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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가 강한 어조로 에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 자신을 의롭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에게 그것은 정의도 아니고 선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가려내 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한 후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에게 참된 회개를 권면합니다.

 

즉, 악을 행했으면 회개해야 하고, 악을 행한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1절과 32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회개했느냐? 묻습니다.

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이 구절은 엘리후가 제시하는 회개의 한 모범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어떤 구채적인 범죄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그칠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회개의 과정이 나의 인식과 결단의 과정이 아니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과정임을 알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주께로 돌이켜 나의 삶이 온전하여지는 복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이 일찌감치 고난의 이유가 자신의 죄 있음을 인정하고 엘리후의 말처럼 다시는 범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모든 논쟁은 세 친구와 엘리후를 만족시키며 종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은 죄를 깨닫고 회개할 줄 아는 신앙을 가졌다고 칭찬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으로 고난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어떻게 말하는가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몇 마디의 말이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복음에 합당한 응답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친구들과 엘리후 마저 욥이 어떻게 말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결국 자신의 주장대로 을 주저앉치겠다는 것 닿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람은 의로움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의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생은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고 의에 기준이 되려고 하는 것이 인생이 종종 범하는 잘못입니다.
내 생각에 가득 찼던 그 자리에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과 뜻으로 온전히 채워지고, 순종함으로 따라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인생이 누릴 가장 고귀한 기쁨인 것입니다.
엘리후의 눈에는 의 태도가 그런 모습에서 멀리 있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겠다는 의도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인생의 중심에 자기 스스로를 두는 것은 분명 악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이 끝까지 시험을 받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했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자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내릴 결론을 미리 판단하여 이 무식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고 단정 합니다.
즉 하나님께 불평하고 무고함에 맹세를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가 보기에 친구들에게 했던 의 말은 불경건한 말이었기에 그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진정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섣부른 판단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의 태도로에 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할까요?

 

 

저희의 삶을 온전히 감찰하시는 하나님
저희 생각과 모든 언행을 아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저희를 지켜 보호하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의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에 기뻐함으로 순종하여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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