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7. | 생명의 삶 | 이해영 목사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또 당황스럽고 또 당혹해하는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사고와 같은 그런 뉴스들이 아닙니다.
진실로 그 안에서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며 지금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감추어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우리가 그곳에서 발견할 때,
세상이 그렇게 하찮게 여기고 또 경멸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웅장하고 위대하게 이 시대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지 우리 모두가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삶 속에 이 세속의 삶 속에,
진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26장 47절에서 56절에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6장 47절에서 56절 말씀입니다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예수님은 그 탄생부터 모든 생애까지 모두가 다 역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역설에 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그 자체가 역전의 하나님을 고스란히 보여주시는 그러한 생애였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삶의 자리 역시 그렇게 역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요?
들리는 것으로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속 뜻을 알아야 하겠고, 의미를 우리가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분명한 속 뜻과 의미의 기준이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주님의 현존과 말씀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의 말씀이 바로 그러한 몇가지의 예들입니다.
47절을 읽어봅니다.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7절에서 주목해야할 표현이 있는데요.
가롯 유다를 가리켜서 열둘 중에 하나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의지를 가진 의도적인 어떤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가롯 유다, 배반자를 밝혀 열둘 중에 하나라고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둘 중의 하나가 누구와 지금 함께 하고 있습니까?
칼과 몽치를 가진 큰 무리를 데리고 오는데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반문해야 합니다.
왜 그 열둘 중에 일원으로서 함께 하지 않고, 그는 여기 칼과 몽치를 들고 있는 주님의 대적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그것이 아이러니이지요?
우리의 삶에 모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여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 속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 속에서 드리워지고 있는 이런 역설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욱더 진실하게 회심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겠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돌이킴의 자리로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48절도 읽어봅니다.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오늘 마태복음은 유다를 가리켜서 또 한번 48절에서는 '예수를 파는 자'라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12 중에 하나라고 하는 그런 표현 보다는 보다 더 유다를 잘 표현한 언급이겠지요?
그러나 유다의 행동은 또한 모순입니다.
유다가 지금 예수를 무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신호로써 그가 채택하고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입맞춤입니다.
'주님을 파는 자가 주님께 입 맞춘다'라고 하는 전혀 다른 양상이 우리들에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보이는 그러한 드라마 같은 장면이지만 그런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을까요?
정말 속 뜻을 알아차리고 우리들에게 펼쳐지고 있는 사건과 사고 속에서 감추어진 우리들의 진실과 그리고 주님의 현존을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우리가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겠고, 새로움에 자리로 도약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49 절에서 50절을 읽어봅니다.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다를 가리켜 '친구여' 하고 그렇게 불러 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끝까지 예수님은 유다에게 기회를 열어 놓은 그러한 언어적인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의 양심이 살아 있었고 또 그의 영이 작용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지금이라도 오늘 '친구야'라고 부르시는 주님 앞에 그가 무엇을 응답해야 될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롯 유다에게는 사실과 그리고 사건들이 얼룩져진 채 진실을 찾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결국 유다의 의해서 무리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어 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유다의 언급 속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겠는데요.
유다는 예수님을 가리켜 '랍비여'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유독 '주여'라고 '퀴리 어스'를 말하지 않은 하나의 제자를 말한다면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줄곳 예수님을 랍비라고만 말했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랍비로만 그쳤습니다.
훌륭한 선생으로만 여겼을 뿐이지 '그가 구원자 이시며 창조주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지를 알게 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오늘도 마음껏 주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기 바라고 오늘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서 주가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자랑하고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그림자와 같은 또 삶의 위선과 모순을 우리가 알아차리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이 길을 우리가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1절과 52절은 앞서 있었던 유다의 상황과 또 다른 정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지금 이 주인공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이 사람이 베드로 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관하여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표현이 또한 중요한데요.
52절 상반 절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까 앞서 가롯 유다를 가리켜 '열둘 중에 하나'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여기서는 '예수와 함께 하고 있던 자 중에 하나'라고 오히려 가롯 유다와는 좀 상반된 모습으로써
지금 칼과 뭉치를 가지고 있는 자와 함께 하고 있지 않고 예수와 함께 하고 있는 바로 그 제자 베드로를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라는 그 사실만이 우리 들의 모든 행동과 삶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행동이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가롯 유다는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지 않았지만 그가 칼과 뭉치를 가진 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반면 그가 스스로 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묘한 대조를 갖게 합니다
그는 칼을 갖고만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칼을 빼서 종의 귀를 쳐서 말고라고 알려진 이 종의 귀를 떨어뜨리게 합니다.
앞서 칼을 든 자를 데리고 왔던 유다나
지금 오늘 본문 속에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지만 스스로 칼을 갖고 칼로써 응답하여 고하는 베드로는
어떻게 보면 양 극단의 있지만 서로가 같은 양상을 취하고 있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이런 폭력을 막으신 이유에 하나여서 다음 구절로 설명합니다. 53절과 54절입니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네 오늘 우리가 정말 간직해야 할 그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힘과 물리력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언제고 어느 때고 왜 사용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54절 하반절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거나 환경에 의존되어진 삶을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말씀을 의지하기 바라며 사건과 사연 속에서 피어오르는 하나님에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놓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의 붙잡히심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는 것. 곧 말씀에 이루어짐에 따른 것이기에
이렇게 위선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이 우리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다지 물리적인 항거라든지 어떤 또 다른 응수로써의 어떤 시위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만을 고지하셨을 뿐입니다.
무엇입니까?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생애가 위법과 불법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주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실망하거나 주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사실 속에 의아함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당당하게 십자가의 그 길을 묵묵히 지금 진행해 나가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우리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과 사고 오늘도 무성히 우리들을 찾아왔겠지요?
우리는 그중에서 때로는 일희(一喜) 또 일비(一悲)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향하여서 정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수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 등장하시는 우리 주님을 발견하면서
기쁨과 환희로서 말씀을 이루어 가는 그러한 자랑스러운 오늘의 생애를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찾아오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모순된 삶의 배반들이
우리의 마음으로 실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본분과 사명을 잊는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부신 모습을 통해
주님과 함께 담대하게 이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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