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3.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샬롬
영화 교회를 섬기는 윤광서 목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만약 어떤 왕이 전쟁을 준비하다가 무기 대신 올리브 가지를 들었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대에는 올리브 가지가 평화와 화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왕의 행동과 선택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분명한 메시지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더 놀라운 방식으로 평화와 겸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세상 권력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겸손과 평화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주시는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요한복음 12장 12절로 1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요한복음 12장 12절에서 19절 말씀입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느니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어.'
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호슈아나라는 히브리어로 그 뜻이 이렇습니다.
'부디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음을 환영하며, 그분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아주 작고 보자 할 것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나타나신 것이지요.
왕이나 높은 권세자들은 흔히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거나 혹은 행진할 때에 말을 타고 입성하곤 했지만,
예수님은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을 이루신 것으로, 시온에 따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나귀는 평화와 겸손의 상징으로, 예수님은 강압적인 통치자가 아니라 백성을 섬기며 화평을 가져오시는 통치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이 기대하는 힘과 권력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겸손과 섬김을 통해 그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로마 제국 당시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워졌던 그 평화의 시대는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번영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귀 타심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겸손하게 섬기고 화평을 이루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임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순전하게 살아가는 모습, 때로 손해를 볼지라도 정직을 택하고 기꺼이 낮아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히 소망하는 그런 겸손이 아닐까요?
당시 사람들에게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을지 모릅니다.
16절은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가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 일이 예언의 성취임을 깨달았다고 기록해 줍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행적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었던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닫게 합니다.
군중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소생했던 과정을 목격했거나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이 놀라운 사건, 이 엄청난 표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는 단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기적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의 열렬한 환영 뒤에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세상적 메시아로 기대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일시적인 영광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저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실 능력자이시기를 기대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얼마든지 이와 같은 오해 속에서 살고 말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열광은 일시적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9절 말씀 보면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하지 않습니까?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백성들을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성리와 역사에 역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리새인들은 군중들의 반응을 보며 한편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구나 하며 절망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계하지 않는 그들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계략을 세우며 자신들의 강퍅함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오해하거나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균형을 잃게 되고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감정 또한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감정이 주도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생각, 자기 마음 중심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신앙은 그러한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나의 상함과 아픔을 십자가에서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외적인 열광이나 형식적인 경배가 아니라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본받아 삶으로 증명하는 믿음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을 가로막는 강퍅한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순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셔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저희도 따르게 하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바리새인들처럼 강팍해지지 않게 하시고 겸손과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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