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0.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할렐루야
영화교회를 섬기는 윤광서 목사입니다.
새로운 소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존 로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느 누구든 그의 지식은 자기 경험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 이상을 상상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깨닫고 믿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자신들의 경험에 갇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보게 됩니다.
또한 자신들의 생각, 경험에 갇혀 있는 자들을 안타까워 하시며 그들의 한계를 넓히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을 의지하며 순종으로 변화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요한복음 11장 36절부터 4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드러낸 부활의 표적
요한복음 11장 36절에서 44절 말씀입니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울고 있는 마리아와 또 그곳에 모여 있는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의 의미는 단지 나사로의 죽음이나 이로 인해 슬퍼하는 자들로 인한 것만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보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한 부류는 36절의 말씀처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면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낀 사람들이었습니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반면에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37절에서 보듯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가 그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면서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같은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시선과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에도, 그 고난을 바라볼 때에도 각기 다른 태도를 드러내곤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하심을 기대하지만, 의심하는 자는 불평과 원망을 앞세웁니다.
당시의 무덤은 돌무덤으로 큰 돌로 입구를 막는 구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믿음의 순종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매장한 무덤의 문을 여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특별한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르다의 이러한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주요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이 무덤의 문을 여는 것은 분명 상식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25절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지만 아직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목격하지 못했던 마르다의 생각은 자기 한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더냐?
이 말씀은 믿음의 본질을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
믿음이란 현실의 불가능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소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담고 있는 의도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믿음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통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음을 붙들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현실의 여러 가지 벽에 부딪혀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한계를 만들고 그 한계에 갇혀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돌을 옮기라 하시는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람들이 돌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41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십니다.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이 기도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며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음을 소원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나사로야 나오라'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 명령 또한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을 불어 일으키시는 것을 넘어서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쳐 이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수의에 쌓인 채로 무덤에서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이처럼 다시 소생하게 된 것은 단순히 나사로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이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권자이심을 우리 모두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렇게 4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것은 나사로에게 육체적 자유를 허락하시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영적 자유와 새 생명 주셨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신만 소생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묶여 있는 모든 것을 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저마다 각기 다른 수의에 묶여 살아갑니다.
어떤 이에게는 헛된 욕망의 굴레요, 세상의 쾌락과 반복적인 죄의 습관의 수위에 묶인 채 그렇게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것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주님은 우리를 묻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풀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 표적은 단지 나사로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생명으로, 새로운 소생으로 이끄신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기도하는 이유를 다른 무엇이 아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하기 위함이니'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이유가 우리 모두의 믿음을 위함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하여도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되어 많은 이들이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듯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사로처럼 절망의 무덤에 갇혀 있을 때가 혹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향하여 나오라 명령하십니다.
무덤에 갇혀 있다면 동굴 속에서 저마다의 만족과 쾌락 또한 반복적인 죄에 갇혀 묶여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부르심에 응답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십시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의 주인 되심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불가능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묻고 있던 모든 것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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