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히브리서 11:8~16)(20230922)

2023.09.22. | 생명의 삶 | 도육환 목사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큐티 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영정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도한 목사입니다.

여러분은 혹 용인에 위치한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방문해 보신 적 있습니까? 

마을길을 지나 순교자 기념관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좌우에 많은 비석들이 열주처럼 도열해 있습니다.

믿음과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의 이름과 함께 그분들의 좌우명이 되었을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는 돌비석들이죠. 

그 사이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저절로 숙연해지고, 순교자들의 신앙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의 명예 전당에 이름을 올린 선진들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돼 있는 10주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묵상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더보기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만약 히브리서 11장이 건물로 이루어진 믿음의 명예 전당이라면, 

아마 들어가는 입구 정면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가장 크게 새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분이지요.

아브라함은 우리처럼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허물도 있었고, 실수도 반복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살아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8절에서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상의 도시 갈대 우르에 있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본향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여행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법 제도도, 국가 간의 협약도 존재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75년을 살아온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길을 떠날 때 약속해 주신 것은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이랍니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입니다.

그가 도착하면 곧바로 확보할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어느 먼 미래에 자손들이 유업으로 받을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식이라면 결코 투자하고 싶지 않은 종목일 겁니다. 

수익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당장의 이익도 없습니다. 

그런데 남은 생애를 걸으라고 하는 겁니다.

불확실한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후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던 아들 이삭도, 또 그의 아들 야곱도

가나안 땅에 살았지만 늘 나그네와 거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거처는 언제나 유목민의 장막이었습니다. 

언제든지 이동해야 했고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내 사라를 장사 지냈던 막벨라 굴을 매입한 것 외에는 한 뼘의 땅도 갖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장에는 아무것도 잡은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소망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400년이 지나서 출애굽한 후손들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렇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때로 무모한 행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잡지 못한 것을 꿈꾸고 소망하게 만듭니다. 

도전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걸음을 내딛게 만듭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라는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약속하신 자를 신뢰할 만한 신실한 분으로 알았다는 겁니다.

사라는 경수가 끊기고 단산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에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가문의 저주로 여기던 때였습니다. 

아들 하나 없던 이 늙어버린 부부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듣기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말씀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내 몸에서 씨를 주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의지를 요구합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유명한 말씀이죠.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하십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출발이 된 말씀이죠.

자신의 나이와 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던 사라 역시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니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은 때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보십시오.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후손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우리의 상황보다,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 믿음이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 안에 갇혀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삼으실 만한 순전한 믿음을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믿음 그 말씀이 끝까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내로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내가 계산 없이, 믿음으로 순종할 일은 무엇인가요?

 

반응형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 중의 하나는 자신을 나그네로 여길 줄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결코 이 땅에 만족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재산을 가졌어도 영원한 나라, 그 본향을 사모하며 삽니다. 13절, 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누구를 말할까요?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을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이죠. 

그들은 약속의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장차 이루어질 그 성취를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조상들의 삶은 언제나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았죠.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채 늘 방황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차 얻게 될 약속의 땅을 마치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이방 땅을 떠돌아다니다가 힘들 때 자신들이 떠나왔던 본토, 친척, 아비집, 아람 땅으로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육신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땅의 도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멘.

믿음의 조상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더 나은 도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사모하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도성입니다. 

멀지 않은 어느 날 우리가 그 성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을 맞이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 모두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우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잊지 않는 바로 그 성, 

하늘의 성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 역시 아브라함처럼 장래에 받을 유혹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가보지 못한 천국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난 영적순례자들입니다.

지금은 나그네처럼 장막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도 잠시 맡겨진 것일 뿐 우리가 주인은 아닙니다. 

맡겨진 시간과 은사, 능력과 기회를 신실한 청지기로서 관리하고 남겨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게 될 우리 육체와 함께 이 장망성의 마음을 두지 않고, 머지않아 받게 될 영원한 유업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다.

우리의 본향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려 맞아주시고,

영예로운 믿음의 전당에 이름을 올려 주실 때까지

매일 매 순간 믿음으로 분투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내가 계속 기도를 심을 일은 무엇인가요?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거룩한 성을 예비하시고 언약을 따라 살도록 초대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육신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삶이 낙은혜인 줄 알고,
하늘 시민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