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사로운 슬픔에 빠져 비난받는 지도자(사무엘하 19:1~8)(20230517)

2023.05.17.ㅣ생명의 삶 | 권오향 목사

 

사사로운 슬픔에 빠져 비난받는 지도자

 

안녕하세요.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권오향 목사입니다.

지나친 슬픔은 자칫해서 깊은 우울에 빠지게 하고, 영혼을 잠식시키며, 심지어는 공동체에게도 어려움을 줄 수 있죠.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서 비탄에 빠진 나머지 미쳐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그로 인해서 나라 전체에는 진한 우울 모두가 감돌게 되죠. 

그러나 다윗은 한 아들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백성들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던 거죠.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다윗의 오늘의 모습을 통해서, 다윗과 같이 슬픔을 당한 자들이 위로받기를 원하고,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오늘 말씀 함께 묵상하시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 19장 1에서 8절입니다. 

 

 

사사로운 슬픔에 빠져 비난받는 지도자

 

더보기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압살롬의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오는 다윗의 군사들은 승리로 인해서 너무나 기뻤죠. 

그러나 이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다윗이 계속해서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서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전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반전이 됩니다. 2절인데요.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다윗은 아마도 죽은 압살롬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또 반대로 반역한 아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양과 감정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겁니다. 

더구나 자신의 죄 때문에 압살롬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죄책감에 더욱 헤어나기 힘들었겠죠.

 

그런데 문제는 다윗 한 사람의 슬픔이 나라 전체의 슬픔으로 변하고, 심지어는 그 슬픔이 수추로까지 변하게 됩니다. 

3절 보실까요?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마땅히 승리를 축하받아야 했던 군사들이었어요.

개선장군처럼 입성해야 될 자들이 마치 패잔병처럼 숨을 죽이며 들어오는 겁니다. 

여기서 가만히란 도둑처럼 몰래 들어오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상상해 보면 참으로 진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비탄에 빠져 울고 있는 왕 때문에, 백성들은 어이없는 수치심을 느껴야 했던 겁니다. 

물론 아들 잃은 아버지 심정이야 오죽했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슬픔을 절제하고 전쟁에서 돌아오는 부하들을 환대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절제할 줄 알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과 사역을 섬기고 감당하는 자입니다. 

물론 남몰래 울어야 하는 눈물이 있겠지만,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함몰되어서 더욱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고요. 공동체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일어선다면 하나님께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14세기에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으로 유럽의 인구들이 3분의 1이 죽어나가고, 거의 모든 가정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아픔이 있었죠.

그렇지만 사람들은 하나둘씩 카르페디엠 외치면서 슬픔을 딛고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카르페디엠이란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라는 라틴어이죠.

과거의 아픔을 뒤로 하고 오늘,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다면 이겨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원치 않는 고통이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불쑥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슬픔을 딛고 일어선다면, 오히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서, 억눌린 자, 메인 자, 슬픔 가운데 있는 자, 이런 자들을 돕고 섬기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 귀히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마저도 많은 이들을 살리는 자원으로 사용하셔서 제 대신 화간을 씌어주시고, 슬픔 대신 찬송을 주실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군사들은 왜 도둑처럼 가만히 성으로 귀환했나요?

 

반응형

 

압은 슬픔에 빠져서 압살롬의 이름만 되메우고 있는 다윗을 질책하죠. 5절과 6절 보실까요?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넋을 놓고 울고만 있는 것은 하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요압의 맹렬한 비난이죠. 

물론 이는 맞는 말입니다만, 다윗의 심정을 눈 것만큼도 배려하지 못한 언사였고, 대의명분만을 앞세운 처사였습니다. 

어찌 보면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더 큰 소리로 다윗을 비난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압의 이 무례한 말은 오히려 슬픔 가운데 놓여 있는 다윗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일이었죠. 

 

다윗도 한 나라의 왕이기 이전에 한 아들의 아버지였고, 자식을 잃고 슬픔에 겨워서 일어서기조차도 힘든 부성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가까이 모시는 부하로서 다윗의 슬픔을 이해해 주며 기다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자신의 공적인 임무에만 충실할 뿐, 다윗을 궁지로 몰아놓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죠.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윗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었고, 다윗의 슬픔에 함부로 침범하는 일이었습니다. 7절 보십시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여러분, 슬픔을 당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이지 정답이 아닙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타당한 조언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자칫 섣부른 충고는 더한 아픔과 상처만을 남길 수도 있죠.

하나님은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셨지 그 외에 다른 말씀을 덧붙이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진정한 위로는 단지 함께 있어주는 것이지 똑 부러진 조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할 줄 알아야 하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느새 슬픈 마음은 서서히 치유되고 자연스레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다윗은 협박하는 듯한 요합의 지시를 그대로 수용하고는 왕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슬픔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나라를 재정비하는 일에 전념을 다 하죠. 

하마터면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서 나라 전체가 혼돈과 방황의 구렁텅이로 가라앉을 뻔했는데, 다윗이 일어섬으로 그 위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우리 모두 헤어나지 못할 정도의 슬픔을 겪을 수 있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슬픔이 우리의 전 삶을 장악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일어서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압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에게 무엇이라고 항의했나요?

 

사랑하는 주님
연약한 인간이기에 우리가 당하는 슬픔을 이겨내기 힘들겠지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일어설 수 있게 하시고,
오늘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