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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 새겨진 하나님의 규례(사무엘하 6:1-15)(20230420)

2023.04.20. | 생명의 삶 | 김주환 목사

 

비극으로 새겨진 하나님의 규례

 

할렐루야

허브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주환 목사입니다. 

오늘도 생명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 줄 믿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배의 장소가 장막이었죠.

그 장막을 거룩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인재였습니다. 

그 임재의 상징과 장소가 바로 언약궤였고요.

언약궤는 하나님이 친히 지시하시고 사람들을 세워서 만들게 하셨던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 언약궤를 만드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 언약궤 구름 날개 사이에 내가 좌정해서 내가 여기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리니 이 언약궤가 있는 그곳에 내가 있느니라'

그런데 사무엘 시대 엘리 제사장 아래서 언약궤를 빼앗긴 이래로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언약궤는 이곳저곳 떠돌게 됐습니다.

사무엘 시대와 사울 시대를 거쳐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50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이 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언약궤는 남의 집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이 언약궤가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게 될 말씀은 사무엘하 6장 1절에서 15절 말씀입니다.

 

 

비극으로 새겨진 하나님의 규례

 

더보기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다윗은 드디어 예루살렘 왕좌에 굳건히 앉았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또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했고 숙적 블레셋까지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의 사명을 이루기 시작하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 언약궤가 방치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이 버젓이 새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다윗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우리 1절 말씀을 보면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언약궤는 적국 땅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힘으로 가져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을까요?

초라하게 모셔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성대하게 모셔오고 싶었던 것이죠. 

다윗은 직접 연주하면서 장엄한 세레모니를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죠. 6절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건입니다.

너무나 즐거움 너무나 감동적인 시간에 갑자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소들이 갑자기 뛰었고, 웃사가 반사적으로 궤를 붙잡았는데,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돌발적인 사태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실까?'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다윗은 정말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했고, 새 수래까지 만들었는데

어처구니없는 결과 앞에서 당황하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잘 믿어보려고 했는데 

정말 바르게 살려고 했는데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가 주어지면 신앙인은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죠.

그러면서 신앙인이 겪게 되는 솔직한 감정은 실망과 분노예요. 

하나님을 향한 분노 

이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주제고 사실 설교하기도 힘듭니다. 

이럴 때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다윗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다윗은 너무 화가 나서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쳐 죽인 곳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신앙으로 덮어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에게 화가 났을 때 그 감정을 부정하거나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어요. 

다윗은 이해하기 힘든 일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섭섭함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누르지도 않았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고 하나님은 이런 그를 결코 책망하시거나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너 웃사가 당하는 꼴을 보고도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너도 죽을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다윗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렇게 분노를 표출했지만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감정은 분명히 지나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감정이 지나가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을 다시 보고 다시 깨닫게 됩니다.

 

언약궤를 옮기던 웃사가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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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다윗은 뜻밖에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게 됩니다. 

큰 두려움과 실망으로 행사를 중단해 버리고 언약궤를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버립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단정 짓지 않은 채 다윗은 하나님을 기다리죠.

 

그렇게 석 달을 기다린 끝에 다윗은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됩니다. 크게 두 가지예요. 

첫 번째 다윗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잊고 블레셋 곧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언약궤를 옮기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일어난 비극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 두 번째 석 달 동안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에 엄청난 복을 주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지요.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모셔오기로 결정합니다. 새로운 용기와 믿음이 생겨난 것이죠.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한 뼈저린 고통을 통과한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모셔올 때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기뻐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죠.

그리고 기대하기 때문에 때로는 실망합니다.

그럴 때 계속 하나님과 감정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돼요. 

하나님은 정말 좋은 아버지시구나.

하나님은 정말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그러나 이 깨달음의 깊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지기 때문이죠.

 

하나님 방법을 따라 내가 다시 시도할 일은 무엇인가요?

 

주님 다윗처럼 주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제 삶의 왕좌는 오직 나의 영원하신 왕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도 내 삶의 왕좌에 좌정하여 주옵소서.
내 방식대로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원합니다.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 앞에서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주님 오늘도 오벧애돔처럼 저와 저의 집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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