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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나 문서

이집트의 제18대 왕조 말기에 군림했던 이단적 파라오 아크나톤은 테베와 전통적인 국가의 신들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 아마르나를 창건하는 동시에 유일신 아톤을 숭배했습니다. 

아마르나 유적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흥미진진한 공식문서 기록인 아마르나 문서는 이집트 학자들에게 당시의 왕실 사정을 꿰뚫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마르나유적이 폐허가 된 후 수세기 동안 이집트의 찬란한 과거를 기록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며, 

신비한 상형문자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지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1798년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세 가지 다른 문자-그리스어, 이집트 상형문자와 민용(民用)문자-로 된 텍스트가 새겨진 흑색 현무암 석판인 로제타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제타석은 영국으로 옮겨져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었으며, 지금도 그곳에 있습니다. 


그후 고전 연구가들은 그리스어 비문을 읽어낼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상형문자의 내용을 해독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연구에 매진했고, 1822년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상형문자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드디어 이집트의 무덤과 신전의 벽에 풍부하게 새겨진 고대의 문자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막대한 양의 이집트 기념물들에서 발견되는 비문을 해독함으로써 학자들은 이집트의 왕과 왕비, 부유한 지배계층이 남긴 공식적인 문서에 다가설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이 문서들이 무척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무덤이나 신전의 벽에 새겨진 비문들은 주로 백성들과 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선전용 문서의 성격이 강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파라오와 왕비, 왕실의 일상생활을 엿보게 하는 비공식적이며 

좀더 사적인 기록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집트의 고대 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1887년 텔 엘-아마르나라는 농촌에 사는 한 여인이 마을 바로 뒤에 있는 사막에서 진흙벽돌로 지은 오래된 건물 폐허에서 작은 점토판이 수없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파라오 문서 보관소였고 그 파라오는 유별나게 이집트에서 유일신 태양을 수배한 아케나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확인 해보니 무려 380개가 넘었습니다. 

이 놀라운 문서들은 대부분 우리가 쐐기문자라고 부르는 아카드어로 표기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카드어는 당시의 혼성 국제어였고, 레반트 도시국가 통치자들과 이집트 파라오 사이에 오간 편지의 공식언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점토판 대부분은 도시국가 통치자들이 이집트로 보낸 서간이거나 파라오가 그들에게 보낸 답장의 보관용 사본이지만 마탄니와 하티[터키],알라시야[키프로스],카르두니아시[바빌로니아],아시리아와 같은 강력한 북부 왕국의 왕들에서 온 서간들도 있습니다. 

이 문서 보관서는 아케나텐의 아들 투탕카멘이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날 때 은닉되었던 것이 발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문서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것을 살펴보기 전에 아케나텐이라는 인물과 그의 시대에 대하여 사전에 알아 두는 것이 이 문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케나텐은 아멘호테프3세와 티예 왕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멘호테프왕자는 형인 투트모세 왕세자가 죽은뒤 아멘호테프4세로서 상,하 이집트 왕관을 쓰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에 아마 공동 섭정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멘호테프4세는 파라오가 된지 몇년도 지나기 전에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바꾸고 종교적,문화적 혁명을 시작합니다.아케나텐은 문화혁명을 진행하는 동시에, 태양신 아텐을 이집트 최고의 신으로 끌어 올리고 테베의 아문 같은 강력한 신들을 대부분 낮은 지위로 끌어내리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강력한 신들의 지위가 이처럼 낮아 지면서 기존의 사제들은 가난해졌습니다. 

이집트 종교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수입을 빼앗겼고 종교적 혼란이 고조되어 광적이고 파괴적인 단계에 이르자 나중에는 막대한 재산까지 빼았겼습니다. 

말년에는 아문신에 대한 의례적 살인을 명령하여 아무도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석공들은 한때 제18왕조의 중요한 신이었던 아문의 이름과 그와 관련된 상형문자를 지우기조차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케나텐의 시대와 그후 수십년동안 이집트는 군사적으로 무력하여졌습니다. 

투트모세3세와 제18왕조들의 확립한 번영은 외교정책의 부재로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검은땅 자체에서는 끊어오르던 불만이 마침내 반란으로 폭발해 혼란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가나안에서는 신생국가가 생겨나기 좋은 기회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아케나텐에 이어 왕위에 오른 투탕카멘 시대에 옛 영화을 되찾기 위하여 아시아쪽의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시도 이루어진 적은 있지만 반드시 되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19왕조의 군사 원정 기록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18왕조의 말기의 파라오들은 대개 군사적으로 무능하였거나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두 세대 동안 이집트에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 특히 투탕카멘 시대의 이집트의 군사를 지휘한 사람은 하렘헤브 장군이었는데 멤피스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아시아 족장들을 사로 잡아 이집트로 끌고 오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 딸려 있던 설명이 사라져 버려서 하렘헤브의 원정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투탕카멘이 죽은 후 늙은 총리인 아이가 왕위를 차지 했습니다. 

4년후 파라오 아이도 죽자 이집트 왕위는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하렘헤브가 왕위제 즉위합니다.




왕위에 오른 하렘헤브는 검은 땅 미츠라임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마무리 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제18왕조의 마지막 통치자는 29년가 이집트를 다스렸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이집트는 레반트 지역에 어떠한 군사적 모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제18왕조는 끝나고 세티1세에 의하여 19왕조가 들어서게 되었고 이집트를 다시 한번 강대국으로 일으키는 일은 람세스 2세가 맏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마르나 문서를 통하여 우리는 알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레반트 지역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움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마르나 문서는 사울 왕의 치세 초기에 팔레스타인의 중부 산악 지방에서 일어난 히브리인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다윗왕 8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공격으로 끝나는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어서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출처 : 크리스찬 해피투어]


http://www.chtour.co.kr/holy/egypt?mode=view&page=1&rows=10&holy_id=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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