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힉소스 이야기

출애굽 성지 순례를 가시면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가 힉소스족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전연 등장하지 않았던 힉소스 족에 의하여 출애굽의 역사성을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힉소스족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통 연대에 의하여 주전 18세기에 접어들어 

아시아까지 세력을 뻗쳤던 대제국 이집트는 세력이 약화되면서 

아시아 지역의 소수 민족들이 이집트 바로들의 지배에서 독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시아 민족들은 이제 오히려 이집트의 북부지역을 침투해서 세력을 그들의 세력을 연장시켜 나갔습니다. 

점점 이집트는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주전1700-1580년 사이에 

시리아-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델타지역을 정복한 부족을 힉소스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집트어로 “외국의 통치자들”이라는 의미인 힉소스족들은 세계 최초로 전차 부대를 이용해서 전쟁을 수행한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나일강 하류의 델타지역인 아바리스[텔 엘 다바]에 수도를 정하고 이집트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는 대체로 강대국이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만 공격해 왔으나 힉소스족의 경우에는 국경을 초월하여 시리아-팔레스타인 뿐만아니라 이집트까지고 원정해서 정복사업을 수행한 것입니다. 

전차부대를 동원한 그들의 위력 앞에 대제국 이집트도 쉽게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는 당시 이집트를 침공한 힉소스족에 대한 공포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가 통치할 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신은 우리에게 돌풍을 몰고 왔다.

뜻하지 않게 동방으로부터 이름도 알 수 없는 침입자들이 자신만만하게 우리의 땅으로 쳐들어 온 것이다. 

그들의 주력부대는 어떠한 반격도 받지 않고 쉽사리 침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이 땅의 통치자들을 물리치고 우리의 도시를 무자비하게 불태우고 신들의 신전을 부수고 토착민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또한 마네토는 힉소스족이 멤피스에서 왕을 세우고 텔타지역의 아바리스에 튼튼한 요세를 세웠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마네토의 보고를 종합하면 힉소스족의 침입 앞에 이집트는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당시의 정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이집트의 세력이 약화된데도 원인이 있지만 세계 최초의 전차부대를 동원한 힉소스족의 전투력이 탁월했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힉소스족과 이스라엘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구약 신학자들은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로 등용된 것은 힉소스족의 바로에 의해서이며, 야곱가족의 이집트 이주도 힉소스족의 통치 시기라는데 대체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힉소스족은 서부 셈족에 속한 민족인데 같은 셈족으로 아시아계인인 요셉을 등용한다는 것은 순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힉소스족의 통치 시대에 아시아계 사람들이 고위관직에 많이 등용되었다는 기록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같은 아시아계인 힉소스족의 바로에 의해 국무총리로 등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생각을 합니다. 

요셉의 총리가 된 시기는 힉소스 시대 이전인 중왕국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창41:14"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입고 바로에 들어가니"라는 말씀으로 보아 요셉의 감옥에 있을 때의 파라오는 힉소스 시대이 파라오가 아니라 힉소스 이전시대의 파라오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힉소스는 아시아에서 온 셈족인 지배자들이며 그들의 퐁속으로 보아 수염을 깎지 않을 것입니다. 

셈족에게 있어서 수염을 깎는 다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은 다릅니다. 

애굽에서는 수염을 깎아야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봅니다.

또 다른 말씀의 근거가 있습니다.

창46: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애굽의 파라오는 셈족인 힉소스 시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셈족은 유목민족으로서 목축을 가증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총리 시대를 힉소스로 보고 있는 것은 성경 기록과 일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힉소스족의 이집트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00여년이 지난 후 이집트 18왕조의 창시자인 아모시스(Amosis)가 남방 테베쪽에서부터 봉기하여 힉소스족을 북방으로 추방시켰습니다. 

당시 근동의 최강국 이집트의 전성시대가 동쪽 바다에서 태양이 떠오르듯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1장 8절은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통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수한 고난과 압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요셉을 모르는 바로는 힉소스족을 추방시키고 이집트 제국을 재건한 18왕조의 바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중왕국시절의 요셉의 총리 시절부터 다음의 지배자인 힉소스족의 바로들에 의해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이제 같은 셈족인 힉소스족이 이집트로 부터 추방당하고 이집트의 토착 왕조가 들어서자 고통의 나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힉소스족의 퇴각으로 히브리인들의 행복은 끝나고, 이집트의 토착왕조가 들어서면서 불행이 시작된 셈입니다. 

전차 부대라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혜성같이 등장해서 한 세기 동안 고대 근동 세계를 풍미했던 힉소스족도 

다시 일어선 대제국 이집트의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근동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유대 민족의 이집트로의 이주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족의 이집트 이주는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의 부족만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 왕조를 구분할 때, 고왕조와 중왕조, 신왕조로 구분하는데,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 즉 대략 BC 18세기 즈음에 이집트를 비롯한 시리아,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통치했던 족속이 바로 이 힉소스족입니다. 

당시에 호전적인 힉소스(Hyksos)인들을 포함한 유목 민족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물결처럼 밀려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힉소스인들은 서쪽의 다양한 셈어를 사용하는 종족들로 대부분 셈족이었으며 일부가 인도, 유럽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서 혼합 미족의 성격이 깊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이집트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말과 전차를 타고 질풍 같이 이집트에 침입해서 삼각주 동쪽을 200년동안 점령하여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은 이집트 전 국토를 점령하지 못하고 이집트 북쪽은 직접 통치하고 북남쪽은 토착세력에 의한 자치를 허용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셈족 계열의 아피루(Apiru)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피루라는 단어는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도 등장하는데, 그 뜻은 "먼지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유목민족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리나라의 신학교에서는 아피루의 뜻을 

"배고픈, 목마른, 맨발의, 먼지의, 말고삐를 잡은 하인" 

등의 의미에서 추출한 헐벗고 굶주린 노예계층으로 해석 하는데 반하여 서구의 신학계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BC 18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의 아마르나 서신들(Amarna letters : 시리아-팔레스틴의 군소국왕들이 이집트왕궁에 보낸 외교 서신)에서 하비루(Habiru)의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 편지에서는 하비루를, 부족적, 가족적 유대가 없고, 국가 조직에 군인으로 고용되어 얽매이거나 제 스스로 행동하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 비정착인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하비루라고 기록되었으며, 

한편 우가릿 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하비루가 이집트 기록에 나오는 아피루에 대한 언급과 동일한 단어임을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아피루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잦은 가뭄 등으로 식량을 제때에 구할 수 없게 되자 비옥한 이집트 땅을 항상 동경했을 것입니다.




또, 유목민들이 이집트의 델타 지역에 이주한 것을 그림으로 설명한 BC 19세기 초의 이집트 12왕조의 고급 관료의 무덤인 베니하산(Beni Hasan)의 벽화에는 왕의 대로를 거쳐 이집트에 도착한 일련의 무리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에는 37명의 아시아인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지도자 이름은 셈어인 이브샤(Ibsha :타지역의 지배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말기 즉, BC 2천년 초기(고대이집트 12왕조 치하)에 이집트 문서들은 그들을 아피루라고 지칭합니다. 

흔히 알려진 대로 베두인이 아닙니다. 

베두인들의 이주는 규칙적이었던데 반면, 아피루인들은 이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피루인들은 2천명 정도의 무리로 조직되었으며, 각 기 전쟁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실존인물 이라고 증거할 수 있다면 ,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 명 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씨족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신의 이름의 약자인 YWH라는 이름의 씨족도 있었는데, 라틴어로 YHWH-야훼와 발음상 비슷한 것에 조금의 주의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실존인물로 추정하여 생각한다면, 그 시대의 파라오들은 필시 제12왕조와 제 13,15왕조에 각각 속하였을 것입니다

(중간 왕조와 그 후시대). 

그때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보디발 수하에 있던 요셉처럼.창 39:1-4) 각계 각층에 진출해 있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같이(창 41:45)당시의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식 이름을 받고 출세 했던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기부터 이집트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여 2대왕조를(15대와 16대 왕조.BC 1790~1580년)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아피루인들은 이집트로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하였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집트 정부의 입장에서 히브리인들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페피 2세 때에는 아피루들이 배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BC 2000년경의 첫 번째 중간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입니다.


야만인이란 약한 아시아인을 말하는데, 

그들은 집이 없고 갈증으로 고통을 받고 나무가 없으며 산을 고통스럽게 걸어 다녀야 한다

....(중략)....

그들은 도둑놈들처럼 침입하여 분쟁을 벌인다. 

나는 하 이집트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목을 베었다. 

그들을 걱정하지 말아라. 

아시아인들은 강가에 있는 악어와 같다. 

그들은 낙오된 먹이를 잡지만 사람들이 많은 마을은 공격하지 않는다.


다른 자료에서는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이집트로 들어오는 아시아인들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고 

수많은 베두인 포로가 국경에서 석방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BC 1429년에 아멘호테프 2세는 3600명의 셈계 포로를 잡았다고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힉소스인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힉소스인들은 도시 이름에 셈어를 사용했고 셈족을 하급 관리로 등용합니다. 

즉, 아피루들에게 고센땅(Goshen)인 델타에 정착하게 허락한 파라오는 힉소스 사람 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그들 왕조와 동맹관계를 취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타 지역 출신인 요셉이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 일화는 아피루들이 힉소스왕들 치하에서 큰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의 암시일 것입니다. 




제18왕조의 파라오 아모시스(BC 1552년~1526년 통치)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민족이 다시 제자리를 찾자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들 치하에서 권력을 잡았던 아피루들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2류 일꾼집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피루들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로 쳐들어올 때 그들과 함께 유입되었거나 또는 이전부터 정착하고 있던 아피루들이 힉소스인들에게 협조해서 이집트인들을 학대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인들이 힉소스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해방 운동을 할 때에도 아피루들은 소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방임했을 것입니다. 

결국 왕권을 되찾은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마을과 신전을 태운 야만인들로 기록했고 문둥병자로 명명했는데, 

힉소스인들과 같은 셈족인 아피루들도 경멸해야 할 민족으로 치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는 것은 이집트 제18왕조를 뜻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아피루들은 비돔, 람셋 성을 건축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제국 시대라고 불리던 BC 15세기는 이집트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념물들이 건립되던 시기였고 

이 당시 삼각주 지역의 힉소스족의 수도였던 아바리스는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설되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델타지역의 아바리스는 북쪽으로 쳐들어 오는 방어선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중요한 요새를 건설하고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도성이 필요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안에 있었다면 이집트 각지에서 건설되던 신전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집트에서는 아피루인들이 적국에 동조하고 협조했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으므로 아피루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멤피스의 아나스타시라는 파피루스에는 노동자의 벽돌 만드는 할당량이 적혀 있는데 

노동자 40인의 대장은 80,000개의 벽돌을 하루에 바쳐야 했으며, 

그것은 노동자 한 명당 하루에 2,000개씩을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의 노동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후, 주로 이집트 18왕조시대, 특히 BC 1450∼1150년 사이 300년 간의 기록에 "아피루"란 말이 아주 활발히 언급되는데, 

이 시기에는 이 아피루들은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붙잡혀 온 전쟁 포로, 혹은 건축 사업 채석장 같은 곳에 동원된 강제 노동자들 또는 노예의 의미로 변하였습니다. 

18왕조의 한 리스트에는 위대한 주인 세네브티시의 95명의 하인 중 48명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고 합니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 함은 베두인을 포함하여 주로 아피루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들 아피루인들은 이집트에 이주해온 다양한 씨족의 셈족 유목민이였고, 여호와를 숭배하는 부족도 그 씨족 중에 끼어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람세스와 세티 파라오의 조각상 뒤에 아피루인들의 신을 적어 놓는 것도 허락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누비아에 있는 신전에는 야훼라는 베두인들이 믿는 신의 이름도 적혀 있을 정도였습니다.




출애굽의 시기를 후기설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출애굽한 사람들이 주로 람세스 2세 통치하에 건축공사장에서 노예로서 노역을 당했던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이 출애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하비루또는 아피루라 불리우는 일단의 노예집단이 출애굽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피루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이집트에서 같은 셈족혈통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이라는 공감대만이 형성되어있을 뿐이었습니다. 

출신 성분과 이주시기가 제 각각인 아피루들은 부족마다 각각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관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고(할례 등은 이집트의 풍습임), 또 이집트에 그들의 종교성을 반영하면서 뒤섞여버렸습니다. 

즉, 유대 민족이 형성된 것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이지, 그 이전에 그들은 이집트로 이주해온 다양한 출신의 셈족 유목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로 인하여 학계에선 유대교가 형성된 것은 모세로부터 약 1600년 후인 에스라, 느헤미야 때인 디아스포하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1929년 셰프로를 단장으로 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우가릿에서 발굴한 점토판에서 아카드와 케레트의 서사시가 나왔습니다. 

아카드 서사시에는 다니엘과 그의 처 사이에는 딸만 하나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다니엘은 시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얻게 되는데, 그후 본부인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면 시녀사이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겠다고 신에게 약속하고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속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삭의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케레트 서사시는 왕비 프로티를 다른 왕에게 빼앗긴 케레트왕이 그녀를 되찾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도 아브라함 이야기와 같습니다.




[출처 : 크리스찬 해피투어]


http://www.chtour.co.kr/holy/egypt?mode=view&page=1&rows=10&holy_id=383

반응형

'해외여행 > 이집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인 역본  (0) 2018.08.29
파라오 케네프레스  (0) 2018.08.29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0) 2018.08.29
아마르나 문서  (0) 2018.08.29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머문 기간에 대하여  (0) 2018.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