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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멀어진 유다의 부끄러운 행위 (창세기 38:1~11)(20221022)

2022.10.22. | 생명의 삶 | 서정오 목사

 

하나님과 멀어진 유다의 부끄러운 행위

 

셜롬

주님 안에서 오늘도 평안하시죠?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삶을 지켜주시는 기적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현재는 CGN TV 후원 행사 기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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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다는 사랑하는 아내의 마저 잃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중에서 셋을 한꺼번에 잃었던 유다는 심히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점잔은 어른 노인이면서도 분풀이를 한답시고

아마도 친구 아둘람 사람 회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그만 정욕에 못 이겨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망조가 들어가는 유다의 가정사, 부끄러운 모습

오늘 본문 창세기 38장 12절에서 23절까지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유다의 부끄러운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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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시아버지 유다가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딤나에 양털 깎기를 하기 위하여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하기 위해 아주 망측한 계획을 세우면서, 몸을 파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위장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오늘 13절 14절입니다.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며느리 다말이 왜 그런 망측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었을까요?

이유는 14절 하반절입니다.

14 ...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는 그 이유는 셀라 유다의 셋째 아들이죠.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장가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죠.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이미 읽은 것처럼 사실 유다는 다말과 함께 살았던 큰 아들 작은 아들이 죽는 것을 바라보면서 성경은 분명히 그 아들들이 여호와께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유다는 저 여자 며느리 다말이 재수 없는 여자 뭔가 애군이 낀 여자라서 아들들이 죽은 것이라고 겁을 먹기 시작한 거죠.

그 아들 며느리에게 셋째 아들을 보냈다가 셋째 아들도 죽을까 봐 그는 아예 마음속으로 안 보여 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막내아들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셋째 아들이 아직은 어리다는 핑계를 대면서 며느리를 친정집으로 쫓아 청산 과부가 되게 한 것이었죠.

시아버지의 궁심을 알아챘던 이 다말은 바로 그 시아버지에게 책임을 말로 할 수도 없고 그때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으니까 법적으로도 할 수가 없었기에 그는 책임을 망측한 방법으로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15절부터 19절까지 읽습니다.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성경 속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참으로 망측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유다, 그 믿음의 가문에 전대미문의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형제들을 말 한마디로 설득할 수 있었던 똑똑했던 유다.

리더십이 있었던 유다.

하지만 믿음의 가문을 떠나 이방인들의 탈락한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살다가 보니까

그만 본능에 매이고 육체의 정욕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게 있습니다. 

탁월한 말솜씨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 아닙니다. 

똑똑한 머리도 아닙니다. 

돈 많이 벌면 가정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거룩한 뜻 위에 자기도 거룩하게 서고,

자녀들도 그렇게 키워갈 때, 가정은 저절로 행복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자식을 키우십시오.

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자녀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십시오.

하나님이 가정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내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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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다말의 유혹에 넘어갔고도 아직도 유다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합니다.

사실 그래도 몸 파는 여인에게라도 약조를 제대로 지킨다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약속했던 염소를 주고는 자신의 신분의 상징이었던 도장, 끈, 지팡이를 되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0절부터 22절까지입니다.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유다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가 천하에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그 중요한 소지품 도장도 끈도 지팡이도 찾기를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지금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당할지도 모르겠다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미 유다는 부끄러운 짓을 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당할 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 

인과응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믿음의 가문을 떠나서 이방 세속 거리를 방황하다가

조상들은 원치 않았던 그 가난안 여인과 결혼해서 본능적으로 가정을 세웠던 그의 결과가 

바로 부끄러운 가정사를 만들어 가고 만 것이었습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이 유다의 이야기는 아주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이야기가 36장 끝 절에서 바로 보디발의 집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로 끝나고
37장 38절에 부끄러운 유다의 가정사 얘기가 나온 다음 

39장 1절에 다시 요셉의 보디발의 종으로 끌려갔던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37장, 38장에 유다의 이야기는 뜬금없이 거기에 들어간 겁니다. 삽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읽어봐도 37장 38장 창세기 그 두 장은 없애버리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36장 끝에서 39장 1절로 이어가야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연결됩니다. 

그런데 뚱딴지같이 37장 38장에서 유다의 부끄러운 이야기,

입에도 대기 힘든 그 이야기를 하나님은 왜 거기다가 실어 넣었을까? 하는 게 의문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것이죠.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주 중요한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3절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이렇게 쉽게 읽어가지만, 이 족보를 아는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이상하겠습니까?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알에게서 애를 낳았다.

이것처럼 추물이 어딨습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1장 이 본문이 무엇인지 아시죠?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아 예수님의 조상 중에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추악한 족보를 통하여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들의 실수와 잘못된 죄악의 현장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실수했어도, 잘못했어도, 두 손 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내가 부끄럽기에 남들 앞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은 무엇인가요?

 

끝까지 참아주시는 하나님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주 예수님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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