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1. | 생명의 삶 | 서정오 목사
샬롬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38장에 들어서면서 꿈꾸는 자, 꿈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던 위대한 요셉의 이야기가 잠깐 중단됩니다.
그리고는 그 장엄하고 멋진 요셉의 출세의 이야기와는 정반대 되는 읽으면 읽을수록 부끄럽고 추한 유다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왜 창세기에 그리고 성경 속에 이런 추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을까 하필이면 요셉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이게 삽입되었을까 의심합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 창세기 38장 1절부터 11절까지 읽어가면서 함께 묵상해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유다 가정의 시련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
창세기 24장 3절을 보면 유다의 증조부였던 아브라함은 자기 종을 불러서 간곡히 이렇게 부탁합니다.
창세기 24: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며느리감으로 가나안 여인을 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향 땅 믿음의 가문에서 데려오기를 소원했던 거죠.
그런가 하면 창세기 28장 8절을 보면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창세기 28:8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이미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아버지를 보니까 그 가나안의 딸들을 아버지 이삭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제 믿음의 가문의 아내를 또다시 들여오고자 하는 꾀를 부리는 것 바로 그 창세기 28장의 얘기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증조부 아브라함 그리고 조부 이삭, 부친 야곱까지도 그 이방 땅 여인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종 차별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순수성,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고백하는 가문의 신앙을 지켜가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던 거죠.
그런데 여기 본문에 나오는 유다는 그런 가문의 절개나 믿음의 전통은 싹 무시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말씀 보면 유다는 자기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형제들을 떠나가 버립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다는 거죠.
그리고 세상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유리방황하다가 드디어 가나안 여인과 그냥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오늘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믿음의 공동체에서 떠나버렸습니다.
'내려가서' 이것은 위도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게 일차적인 의미이지만,
영적 의미는 타락한 자리로 가버린 겁니다.
'아둘남 사람 히라와 가까이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소아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며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사실 어떻게 보면 유다는 참 형제 중에서도 뛰어난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똑똑했습니다. 설득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유다는 자신의 그 똑똑함 잘난 건 때문에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나 같이 똑똑한 사람이 이 믿음의 공동체에서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거 싫게 여겼던 거죠.
집을 뛰쳐 나아가서 가나안 땅 이방 땅을 휘젓고 다니다가 육체의 욕망에 휩쓸려버리고 그렇게 자기 인생을 살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얻은 아들들, 믿음의 아들들은 못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필이면 요셉의 장엄한 멋진 이야기 구원의 역사 속에 유다의 이 부끄러운 이야기가 나왔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고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말라는 겁니다.
잘 났으면 우리가 얼마나 잘났고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떠나면 우리는 끝이 아닙니까?
혼자 잘났다고 믿음의 공동체를 함부로 떠나지 말라는 겁니다.
함께 있으라는 거죠.
그리고 육체의 본능에 매이지 않도록 항상 깨어 조심하라는 겁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두 번 반복되는 문장이 나옵니다.
바로 7절과 10절입니다.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끔찍한 말이죠. 10절 또다시 나옵니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두려운 말씀입니다.
유대의 장자 엘도 그렇고 두 번째 아들인 오난도 그렇고
하나님이 보시기 악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가문과 믿음의 전통을 무시해버리고 신앙 공동체를 떠나서 제 멋대로 살던 유다가 이룬 가정,
그리고 믿음을 떠나서 불신으로 낳은 아들들
사실은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당연한 이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의 가정의 이런 불행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고 돌아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원인과 잘못을 며느리에게로 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 다말 며느리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두 아들 다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 머리 좋은 머리로 잔꾀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셋째 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그 며느리를 쫓아내서 친정집에서 평생을 청상과부로 살게 만든 것이지요.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겉으로는 말로 '아직 장성하지 않았으니까 셋째 아들이 크면 결혼시켜주겠다'라고 약속하지만,
속으로는 아들이 죽을까 봐 셋째마저 죽을까 봐 아예 멀리 쫓아버린 것이지요.
'대학'이라고 하는 책의 앞부분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길게 나오다가 이런 문장이 나오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아마 이 문장만큼은 아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신(修身) 자기 몸을 다스리고,
그리고 제가(齊家) 집 안을 가지런히 한 후에야.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다스린다 통치한다 그런 뜻입니다.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 거짓 하나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그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면서 남 탓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니 교회 안에서도 또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한 그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만이 아니라
사실은 그 두 아들을 낳은 유다가 바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유다를 하나님은 당장 죽이시지 않으십니다. 이것 또한 놀랍지 않아요?
그리고 이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유다라고 하는 사람의 가문 속에서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내신 것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풍성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봅니다.
오늘 그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그분 안에서 하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과 쉼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잘난 것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교만해서 믿음의 공동체를 어지럽게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순간마다 겸손히 엎드려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며 형제와 자매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남은 생애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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