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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멸한 부패한 세상, 새 생명이 움트는 세상 (창세기 8:1~12)(20220815)

2022.08.15. | 생명의 삶 | 안광국 목사

 

물로 멸한 부패한 세상, 새 생명이 움트는 세상

 

할렐루야

금호 중앙 교회를 섬기는 안광국 목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임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만큼 좋은 책을 만나는 것도 참 큰 기쁨이 되죠. 

제가 최근에 아주 좋은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는데요. 

그 책은 바로 김영봉 목사님의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으로라는 책입니다.

상처받은 현대인들에게 참 큰 위로가 되는 책이었는데, 이 책의 한 구절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영성 작가인 리처드 노원은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 '상처는 전환되지 않으면 전이된다'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 있는 구절입니다.

상처는 전환되지 않으면 그것이 반대 방향으로 바뀌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상처가 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인생의 큰 깨달음을 깨닫고 상처를 통하여 놀라운 성공을 이루는 것도 발견하게 되고, 반대로 그 상처 때문에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듦과 어려움을 의도하지 않게 나눠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이죠. 

 

인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물 심판이라는 큰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심판이 전환이 될지, 혹은 전이가 되어질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은 창세기 8장 1절에서 12절까지에 있는 말씀입니다. 

 

 

물로 멸한 부패한 세상, 새 생명이 움트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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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먼저 1절에서 7절까지에 있는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 1절 말씀만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그때의 그러나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접속사 배가 가장 먼저 나오고 기억 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번역본과 좀 다르게 그때 기억하셨다. 그러나 기억하셨다고 하는 말씀이죠.

인류는 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물 심판이 끝이 아니었고 하나님은 이불 심판 이후에 그러나라고 하는 전환을 의미하는 접속사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 심판을 하셨지만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기억하라라는 말은 '자칼'이라는 말인데 '다시 무언가를 생각해냈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새겨져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물 심판을 받았을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노하우와 노아와 함께한 사람들 그리고 많은 들짐승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하게끔 다시금 축복해주셨다. 이런 말씀이죠. 

 

이사야 49장 15절 16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잊어버리셨군요. 

어떻게 택하신 백성을 이렇게 잊어버리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탄과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 49:15, 16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의 손바닥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잠시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고난 가운데 두셨을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우리를 다 잊어버리셨군요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나를 잊어버리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과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맞으십니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손바닥에 너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는 잊히지 않는 이름인 것을 기억하는 오늘 여러분의 하루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그냥 홍수가 그친 것이 아니라 재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고'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1장 2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하는 말씀과 아주 유사한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과 본문의 1절에 하나님의 바람 똑같은 '루아흐'라는 단어이죠.

또 3절 말씀에 보면 150일 후에 땅의 물이 줄어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7장 24절 말씀에 보면 물은 150일 동안 이 땅 가운데 넘쳤다. 이 땅 가운데 넘친 시간만큼 물이 빠졌다는 것이죠. 

또 4절 말씀에 보면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러 있으며 이 머물다는 말은 '누아흐'라는 말인데 쉼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 쓰였냐면 2장 15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었다고 할 때 이 두다고 하는 말이 '누아흐' 쉼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이죠.

결국 이 창세기 8장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은 단순히 그냥 물이 줄어들고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노아 시대에 창조를 다시 한번 재창조의 역사로 이루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절망합니다. 

우리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절망합니다. 

안 돼 이제는 도저히 바꿀 수 없어라고 우리는 스스로 절망하며 생각합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의 인생을 다시 한번 재창조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정을 다시 한 번 재창조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재창조의 놀라운 역사가 노아의 시대와 같이 우리의 삶 가운데도 우리의 가정 가운데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재창조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는 방법과 때가 언제나 옳고 선함을 신뢰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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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우리 같이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땅에 머물고 창문을 열어 먼저 까마귀를 보내죠. 그리고 그다음에는 비둘기를 보냅니다.

다시 한번 7일을 기다려 또 비둘기를 보내고 세 번째로 비둘기를 보냈을 때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었죠.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 중에 9절에 있는 말씀을 한번 깊이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9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이 9절 말씀에는 굉장히 독특하게 세 번의 히브리어 동사가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손을 내밀다라고 할 때 내밀다는 말은 '샬라크'라고 하는 말인데, 이것은 사실 보내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라하흐'라고 하는 말은 구원하다 취하다라고 하는 말이고, 들어오다고 하는 '야베'라고 하는 그런 단어가 쓰입니다.

단순히 비둘기가 방주 안으로 들어오는 이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냥 비둘기가 들어왔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었을까요?

이것을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구원의 그림자와 같은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샬라흐' 하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라카흐' 하시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오게 '야베'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이 비둘기 한 마리가 방주로 들어오는 이 장면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저 먼 곳을 향하여 구원을 향하여 올라간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만 다를 뿐 먼 곳에 꼭대기에 올라가면 다 똑같을 텐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잘못된 이야기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을 저 먼 하늘에서 이 땅으로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분께서 이 땅 가운데 낮은 곳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 노아의 방주에 비둘기 한 마리 그 미물 생명체 하나가 들어오는 본문에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이 땅 가운데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다시 한번 바라보며 묵상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독생자들을 보내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여 주신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 이해할 수도 없는 그 놀라운 사랑을 이 아침에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하나님 그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묵상하며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시작하고 계시기에 내가 참고 견딜 것은 무엇인가요?

 

 

살아계신 아버지의 하나님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셨으나,
노아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기억하시고,
노아와 가족들과 들짐승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우리가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셔서,
절망 가운데 실패와 낙담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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