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0.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샬롬
영화 교회 윤광서 목사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 기뻐하게 되었다면, 그 일이 만족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기쁨은 없으며 만약 만족이 없이 기뻐한다면, 기쁜 척하는 것이지 만족에서 비롯된 기쁨은 아닙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진정한 만족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통해서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욕망이나 결핍을 물리칩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복음만으로 진정한 편강을 누리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처럼 무화가나무가 무성히 못하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고, 무리와 외양간의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7장 8절부터 16절까지 말씀에서 근심을 물리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 말씀을 통해 깨닫는 은혜가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회개로 이끈 근심, 신뢰 회복의 기쁨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
바울은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를 위해 영적 아비 된 심정으로 엄중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 앞으로 올바르게 인도하고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10절 말씀을 통해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근심이 있다고 일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근심은 온통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성도들은 근심마저도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세상에서 잘 살고 못 살고의 차원에 더 이상의 근심은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의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들이 내게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관건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그 뜻 가운데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벗어나 있는지가 더 큰 관심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근심은 믿음의 영역에서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근심이 하나같이 세상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고 영적인 것이나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근심이 없다면, 결국 그의 관심은 세상에 있을 뿐이오 하나님께 마음이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 것들로만 근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 결과임을 알고 그 세상 근심의 문제를 근심한다면 주님께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또 우리의 관심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으며, 또 우리 근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분주하고 바쁜 까닭에 주님을 향한 관심과 소망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로 인하여 애통해하며 자복하는 마음으로 근심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사에 분주한 나머지 주님께로부터 멀어진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것으로 마음 아파할 줄 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사람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깨달을 수 있고 마땅한 근심을 고민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 영혼을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의 마음을 때로 근심케 하시고 아픈 마음으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내가 내단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서 탄식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로 후회하였다고 했으나 후회는 오래도록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그 편지로 인한 근심이 고린도 교인들의 회개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 증거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회개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승리하셨고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오직 그 인도하신만을 의지하십시오.
성령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할 때에 근심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몇몇 개인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 온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서 온전히 그리고 든든히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편지를 보낸 겁니다.
처음에는 냉혹한 어조가 담긴 자신의 편지로 인해 저들이 마음을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회개에 이르러 간다는 소식을 디도에게서 듣고 무척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심정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어떤 점이 바울을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요?
자신의 편지가 큰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만일 누군가에게 권면했는데 그가 듣고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누구라도 뿌듯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에 보냈고 그 결과로 저들이 회개에 이르렀지만 그 자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깨달아 깊이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일의 동기가 되는 출발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어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가 좋다고 자기를 자랑하거나 교만으로 귀결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나쁜 결과에 낙심하고 원망만 남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것으로 동기를 삼고 목적으로 소원을 두며 그 과정 중에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할 것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받았다고 고백하는 위로와 기쁨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바울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마땅한 감사를 알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격려하며 치하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자신을 대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성도들이 훌륭한 신앙인들이라고 칭찬했다는 언급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디도에게 한 칭찬이 거짓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며 기뻐합니다.
그 자랑의 근거와 이유로 그들이 기도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영접하고 순종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 서신에 몇 차례 등장하는 이 표현은 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보여주었던 인간의 태도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즉, 고린도 성도들이 기도를 영접하고 그의 권면을 받아들일 때 이 일들을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였으며
주님을 향한 이러한 순전한 태도가 바울과 디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이유로 무수히 많은 갖가지 근심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도 그런 형편 가운데에 살아갈 것입니다만은,
썩어질 세상의 허탄한 근심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온전케 하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회개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은혜로 옷 입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허망한 세상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진리의 말씀을 통해 저희의 허물을 보게 하실 때에 회개함으로 주께 나아가는 성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더 기도하고 헌신함으로 자랑스러운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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