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5. | 생명의 삶 | 도육환 목사
안녕하십니까?
온누리 교회 양지 캠퍼스를 섬기는 도육한 목사입니다.
여러분은 성찬식에 참여하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아마 팬데믹 기간 동안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찬식을 갖지 못했으니
아마 2년 이상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불가피하게 성찬식을 가질 수 없었지만, 성찬식은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괜찮은 행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제정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수많은 박해 아래에서도 지켜왔던 고귀한 성찬식에 우리가 다시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사모함으로 기다리십시다.
오늘과 내일은 공교회 활동해 주신 두 번째 지침인 성만찬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절에서 26절 말씀 묵상하는 동안 성찬의 본질과 의미를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실현하는 성만찬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사도 바울이 성찬식에 대해서 교훈을 주게 된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성찬식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현상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여자의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로 교인들을 칭찬했던 바울은 성찬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책망하고 있습니다.
성찬을 위해서 모이는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울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8절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말씀의 해석이 좀 난해합니다.
마치 바울이 성찬식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교회 내 분쟁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개바와 아볼로 바울과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4개의 분파들이 있었고, 이외에도 성찬과 관련하여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에서 발생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성도들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모여서 애찬을 나누던 습관과 같이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로 식사하고 그 이어서 성찬식을 가졌던 겁니다.
이에 필요한 빵과 포도주는 성도들이 각자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눠 먹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여유 있는 성도들은 질 좋고 양도 많은 좀 더 많은 음식을 가져오게 되었고, 가난한 성도들은 소박한 음식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구별 없이 차려진 풍성한 애찬으로 모두 함께 식사를 즐겼을 겁니다.
주인과 노예 부자와 빈자가 내 것 네 것 없이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이 사람의 식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마 가난한 성도들에게나 노예들에게는 일주일 내내 가장 기다리던 식사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와 감동이 슬슬 식어가기 시작했고 현실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었던 겁니다.
별로 내놓은 것도 없는 가난한 성도들이 염치없이 맛있는 음식 너무 많이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뭐 지금도 음식 때문에 마음 상할 때가 없진 않죠.
이때 부자들의 성도들의 마음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늦게 오는 성도들을 기다리지 않고 일찍 와서 좋은 음식 먼저 먹어버린 것입니다.
일찍 올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일에 크게 매이지 않아도 되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었을 겁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배불리 먹고 취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뒤늦게 애찬 자리에 앉은 가난한 성도들 노예들은 이후에 먹을 음식조차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종일 일하고 지친 몸으로 공동 식사에 참여한 가난한 성도들은 음식도 부족했지만 부자 성도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더 컸을 겁니다.
바울은 단호한 말로 이 일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일부 성도들의 이기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성찬의 참된 정신을 위배하는 행동이라고 꾸짖습니다.
교회에 속한 지체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모인 애찬의 자리에서 오히려 차별과 상처를 남기고 있었던 겁니다.
또한 주님과 영적인 연합을 도모하고 성도들과 하나 됨을 확인하는 이 성찬의 본뜻과는 달리 차별과 냉대로 빈궁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33절에서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고 해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 누군가가 소외되고 있는지 혹 누군가는 마음 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게는 습관입니다. 당연히 그래도 될 만한 자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행하는 이 일들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움을 안기고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입니다.
서로가 다른 지체의 약점을 담당하고 미숙한 것은 기다려주고 배려해주는 마음들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하나 됨이 증거 되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눈을 크게 뜰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봅시다.
혹 나로 인해서 마음 어렵고 힘든 이가 없는지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임과 관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찬은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당연합니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에 함께하신 주님께서 직접 재정해주신 것입니다.
떡과 잔으로 '내 몸과 피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 기원이 사람이나 교회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례전이기 때문에 성찬례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예식입니다.
너무나 유명하고 중요한 말씀이죠. 23절에서 26절까지 본문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다 읽겠습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아멘
내가 너희에게 전한 성찬례는 우리 주님께 받은 것이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나를 기념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어주신 몸과 피는 우리를 위한 대속 재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성자를 우리 위에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값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때문에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내게 자격과 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고백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속의 은혜 감사합니다.'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고백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동시에 그 사랑이 내게만 아니라 지체를 이룬 우리 형제들에게도 임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임의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신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조건 없이 사랑하셔서 친 백성 삼아주셨다면, 우리도 우리의 지체들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 피 받아한 몸 이룬 형제자매입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승찬은 우리를 증인석으로 이끌어갑니다.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내게 이토록 구원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면, 아직도 그리스도에 대해 외인이요 소망이 없는 이방인 아직도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속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이 복된 소식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부유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마다 영적인 목마름과 외로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찬에 임할 때마다 십자가의 은혜와 감격이 더욱더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이 성찬의 감동이 클수록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 깊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의 애찬과 교제를 복되게 하셔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해 주옵소서
또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도들과 하나 되어
이 대속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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