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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확증하신 하나님의 참사랑 (로마서 5:6~11)(20220416)

2022.04.16. | 생명의 삶 | 권오향 목사                                                                                                         

 

십자가로 확증하신 하나님의 참사랑

할렐루야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권오향 목사입니다.
이번 고난주간 어떻게 보내셨나요?
늘 있는 절기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체험하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죠.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죄 사함에 은혜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로마서 5장 6에서 11절 말씀 함께 보시겠습니다.

십자가로 확증하신 하나님의 참사랑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더보기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늘 말씀의 첫 구절 6절에 말씀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 주는 구절이다 생각이 되는데요.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여러분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제멋대로 살았어도, 도저히 용서치 못할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신다는 것이죠.
그 이유인즉슨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는 예화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무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하며 오로지 아버지의 재산 만을 원할 뿐이지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아버지는 그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수단일 뿐 아버지와 관계 맺는 것은 지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거절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을 내어 주는데,

아들은 영락없이 아버지가 받은 재산으로 흥청망청 창기와 놀아나면서 다 탕진해 버리고,

결국 돈이 떨어지고 갈 데가 없으니까 그제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아버지는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꼬박 동구 밖에 나가서 기다리다가

아들을 보자마자 버선발로 뛰어가서 맞이하고,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으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은

'내 아들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니 나와 함께 즐거워 하자'

라고 말하죠.


팀 켈러 목사님은 이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탕부하나님'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당부 하나님의 영어 제목은 The Prodigal God

Prodigal 이란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해픈,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쓰는 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제목대로 하나님은 부모 할 정도로 헤프게 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심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 받아들임은 아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됩니다.
사랑이 먼저이지 회개가 먼저가 아니었어요.
즉 하나님은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나를 받아 주신 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받아주시고, 회개는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입니다.

그러게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날마다 복음이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모한 사랑이 담긴 진정한 복음이야 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참된 소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8절 보실까요?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우리에게 임한 구원은 구원받을 자격이나 자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어떤 선행이나 수행으로도 심지어 덕망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는 없죠.

오로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덮지 못할 악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맘먹을 수 있는 죄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아버지의 이 무모한 사랑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우리도 사랑으로 반응해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가슴에 손을 놓고 조용히 말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버지의 물밀 듯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적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사람들을 위한 죽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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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결국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죠.
10절 보실까요?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감정을 서로 나누는 친밀한 관계죠.


그러기에 인간의 본질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도 알고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도 사랑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의 모습이었죠.


그런데 너무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관계는 깨어지고 말죠.

10절에 말씀처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바람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에덴에서 쫓겨나 유리방황(流離彷徨)하게 됩니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달아나 정착한 곳은 '놋'이라는 땅이었는데요. 그 '놋'의 뜻은 '방황'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말해 준다고도 할 수 있겠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리 수고해도 덧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고

자신에 대한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결국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마저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욕구만 남아서,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고,

세상 또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일 뿐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라'는 그 명령은 새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살게 되죠.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하고 무섭죠.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각종 정서적, 신체적인 질병들, 가정의 파탄, 무한 경쟁,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지구 온난화와 같은 환경오염 등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을 그냥 내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를 원하셨죠.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어진 관계에서 파생된 모든 문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피스메이커(Peacemaker)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는 종교라 하기보다는 관계라 할 수 있죠.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회복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11절 보실까요?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이 기쁨을 소유하고 계신가요?
만약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이 기쁨이 사라졌다면, 다시 이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 사랑이 있음을 믿으시고,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자랑하나요?

 

이 세상의 모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화해자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참 사랑이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화평을 전하는 자들 되게 하시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또한 화해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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