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통을 더할 뿐인 헛된 위로자 (욥기 16:1~17)

2021.11.01. | 생명의 삶 | 권오향 목사                                                                                                         

 

고통을 더할 뿐인 헛된 위로자

 

안녕하세요

온누리교회 권오향 목사입니다.

CNG TV 정기후원에 달입니다.

CNG TV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정기 후원에 동참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온누리 교회를 섬기고 있는 권오향 목사입니다.
고통을 겪는 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갖다 준 다해도, 사랑과 격려가 실려 있지 않는다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죠.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가 필요한 때이죠.

참된 위로는 고통당하는 자의 아픔을 감싸 줄 뿐만 아니라, 그 영혼에 생기를 줄 수 있음을 믿으면서

우리 모두 진정한 위로자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오늘 말씀은 욥기 16장 1에서 17절 말씀 함께 묵상해보죠.

 

 

고통을 더할 뿐인 헛된 위로자


욥기 16장 1절에서 17절 말씀입니다.

더보기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친구 엘리바스로부터 들은 가혹한 말들은 욥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합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한다고 찾아온 친구들에게서 전혀 위로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상처만 받을 뿐이죠.

자신에게 불어닥친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운데 친구들이 내뱉는 말들은 욥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실은 친구들의 하는 말들이 욥이 모르는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오랫동안 내려오는 지혜 전통, 인간 응보의 교리는, 이미 욥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동안 믿어왔던 교리였죠.
그러나 지금 고통의 한 복판에 있는 욥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들은 독화살이 되어 욥의 마음을 찌르고 정죄하듯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욥에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욥은 그들 향해서

'너희는 나를 위로한다지만 정작은 고통을 안겨 주는구나.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고, 나도 그럴듯한 말로 너희를 칠 수 있다'

고 항의하던 쏘아붙입니다.

 

여러분 욥의 친구들은 욥의 비보를 듣고 그를 위로하고자 달려온 절친들이죠.

친구를 위로하고자 자신의 모든 스케줄을 뒤로하고 일주일 이상이나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은 매우 귀한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데 그것은 고통당한 친구의 마음을 공감하는 거죠.
공감이란 상대방의 상황이나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공감이란 단어는 '들어가서 느끼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죠.

 

여러분 사람은요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정답을 몰라서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고 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고, 사람들에게 용납받고 싶은 거죠.
그러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는 것, 그들의 상황에 들어가 함께 느끼는 것,
섣부른 충고나 틀에 박힌 조언을 자제하는 것이야말로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공감의 대가셨죠.
그러기에 우리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정답을 주려고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한 위로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위로를 경험한 자만이 고통당하는 자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며 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아픔이든 다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여러분을 모든 슬픔을 다 품어 주시는 주님의 극진한 사랑을 누리면서,

그 받은 사랑으로 고통당하는 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주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비난을 그치고 참된 위로를 전할 친구는 누구인가요?

 

 

반응형

 

욥은 아무리 친구들에게 자신의 화를 쏟아내어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고통의 가중될 뿐이죠. 6절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이제 욥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자 이제 그가 하는 말을 잘 보십시오.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 하리이다
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자 잘 보시면, 7절과 8절에서는 '주께서'라는 2인 징 주어를 쓰고 있고요.

9절에서는 '그는'이라는 3인칭 주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죠.

때로는 하나님을 바로 옆에 계시는 당신으로 느끼기도 하고, 또 저 멀리 계시는 그분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를 거절하고 외면하시는 분이라는 생각마저 들면서, 혼란스럽고 우울과 좌절이 따라오는 것이죠.
그러니 욥은 평소에 그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고뇌가 깊어집니다.

 

그의 고통의 얼마나 힘겨웠는지 16절 한번 보십시오.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죠. 17절입니다.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비록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탄식하지만, 그 고난에서 구원해 줄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기도합니다.
즉, 자신의 처한 모든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새로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유럽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다는 말들을 하죠.
특히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 중에 70%는 '하나님이 없다'하면서 거의 다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되면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유대인들은 키부츠(Kibbutz)와 같은 결속력
있는 공동체를 세웠지만, 대부분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현상이 일어난 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6.25라는 전쟁, 그 처절한 고난 가운데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찾고 전심으로 기도에 매달립니다.
그러기에 오늘날과 같은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이 있었던 거죠.
자 이제 우리는 다시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적인 고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업을 잃었고요.

또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채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불우한 현실을 맞이 하게 됐죠.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무리 극심한 고난이 있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더욱 하나님께 소망 두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음 가까이에서 삶의 의미를 깊이 느낀 것은 언제였나요?

 

사랑하는 하나님
아무리 사람들의 말이 나를 흔들어 놓고
고난으로 인해 지독한 번민과 갈등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도의 손을 높이 드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고통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뵈옵는 영광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ND

 

CGNTV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gntv.net

생명의 삶 구독 : http://www.duranno.com/qt/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