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1. | 생명의 삶 | 권 준 목사
안녕하세요.
시애틀 형제교회 권 준 목사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 삶에 내가 원치 않은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에게? 왜 나에게?'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내면에 진정한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부르짖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서 우리 예수님은 '내 영혼을 주께 맡깁니다'라고 고백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나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는
이 고백과 이 믿음으로 주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욥기 10장 13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징벌 같은 고난 속에서 갈망하는 안식
욥기 10장 13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
평소에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큰 고난을 당하면 신앙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세상 살기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인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 삶에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과연 의로우신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먼저 인간의 현실에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정성스럽게 만드셨고, 생명을 주셨고, 보호하셨는데
'왜 하나님이 자신을 적대시하고 계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 13절 과 14절 말씀입니다.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욥은 이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의 목적이 벌을 주시기 위함인가?
아니 왜 피조물을 멸하려 하시는가?
욥의 추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실 때부터 멸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가차 없이 자신을 징벌하시고 소멸하려고 작정하신 분이시다고 지금 불평을 쏟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주시기보다는 죄를 지었을 때 벌주시기를 더 즐겨하시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것이죠.
여러분 칭찬받고 싶어서 노력을 하는데, 야단을 치시려고 작정하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그래서 욥에는 소망이 없음을 지금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15절, 16절 말씀입니다.
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자신이 악인이라면 징벌을 내리는 그 화를 기꺼이 받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욥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욥이 의롭더라도 그를 미워하시기에 환란을 주신다.'
이것이 지금 욥의 생각입니다.
'아니 내가 실제로 죄를 범했다면 변명하지 않겠다.'
이것이 욥의 고백이에요.
'내가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죄를 어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죄인도 아닌데 어찌 용서를 구하는가?'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의로 주장하기 위해 머리를 들면, 젊은 사자처럼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으시는구나
자신의 무지함을 증명하려는 시도조차 차단하시는구나
그래서요 욥은 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죠.
17절 말씀입니다.
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무지함에 대해 방어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반대 증인을 세우신다.
수많은 군대가 번갈아가면서 적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혼내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그래서 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 억울해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목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compassionate heart
그래서 자신의 그 자비를 베푸시는 그러한 하나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기를 즐겨하시고, 죄를 징벌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하나님, 그래서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나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 이 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오늘도 그 하나님의 자비 하심 묵상하며, 그 자비와 그 긍휼의 마음을 구하며
우리 또한 그 긍휼의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함께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 욥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18절 19절 말씀입니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이렇게 고달프게 하실 거면,
왜 태어나게 하셨는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
아니 복을 주시려고 만드신 것이 아닌가?
욥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기뻐하셨고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기에게는 이렇게 하시는가?
어머니 태에서 이미 죽은 아이처럼, 그냥 무덤으로 곧장 갔으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텐데 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22절 말씀입니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죽음의 자리로 가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잠시 남은 기간이라도 평안을 간구합니다.
참으로 고달픈 삶이었습니다.
치열한 삶을 살아온 욥은 지쳐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지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나님께 잠시 평안을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장소로 갈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하나님의 간섭 없이 휴식을 취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이
여러분 그것이 평안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심이 그것이 복이겠습니까? 큰 저주 아니겠습니까?
내 인생의 하나님의 간섭하심,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큰 은혜죠.
하지만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극적이면, 욥이 지금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완전히 낙심한 상태에 놓여있는 욥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위로를 구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인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때야 말로, 이때야 말로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랄 때 아닐까요?
왜냐하면, 나를 그냥 두시면 내가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그냥 두시면 그것이야말로 저주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그 창조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욥. 그래서 그는 고난 가운데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가운데, 탄식 가운데,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인생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아픔과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고통을 견디십시다. 믿음으로 이겨 냅시다.
우리는 고통 너머에서 영광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고 싶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섭 없음이 저주이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평안임을 또한 고백합니다.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도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에게 이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주여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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