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7. | 생명의 삶 | 임병선 목사
청년 사역을 하다가 보면 청년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상담을 하거나 조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뻔히 결혼하면 신앙적 문제가 생기거나,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청년들에게
성경말씀을 토대로 그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 그 관계에 있는 청년들이 대부분 제 조언, 성경에 그 말씀을 잘 들을까요?
제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결론적으로 제 말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말하죠.
"목사님, 그래도 좋은걸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좋은걸 어떻게 하겠어요.
하지만 한편 이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왜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와 결정을 말씀이 아닌 자신의 감정에만 맡겨 둘까?
우리는 어떤 중요한 것을 결정하고 선택할 때, 어떤 기준과 잣대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1절에서 19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온전한 믿음
마태복음 11장 1절에서 19절 말씀입니다.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오늘 말씀에서 세례 요한은 그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3절이죠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한마디로
당신이 우리의 구원자입니까?
당신이 우리의 메시아입니까?
당신의 고통과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 백성을 구원할 자 이십니까?
예수님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묻습니다.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자의 모습, 메시아의 삶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구원자를 바랐고, 그들은 로마에 속박에서 그들을 건질 메시아를 원했는데,
예수님은 그 모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동과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 예언에 담겨있는 이사야 35장과 61장에 나타난 말씀을 들려주면서, 본인이 그들이 찾는 메시아이며 구원자이심을 명확하고도 객관적이게 성경에 나타난 예언을 근거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에 중요한 선택 결정은 내 호불호나 내 감정, 내 생각, 내 주장, 내 선입견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정말 중요한 선택과 결정은 바로 말씀으로 하고, 말씀이 그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외에 공동체를 통해 해석되고 검증되어야겠지요.
네 물론 우리의 감정, 우리의 호불호 내 생각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분명 참고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 말씀을 무시하고, 말씀에서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인생에 결정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과 제자들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과 입장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처럼 보이지 않고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자의 모습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호불호, 그들의 판단, 그들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말씀이 메시아를 누구라고 하는가?
말씀은 메시아를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가?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과정에서 오는 것인가를 알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고 중요하고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세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메시아다. 자신의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다. 자신의 예수님 동생이다. 자신의 하나님이다.'
아직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계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우습지만, 더 심각한 건 아직도 그런 사람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상황, 자기감정, 자기 판단, 자기 고집에 매몰되어서 진리이고 객관적인 말씀을 저버린 결과
그들은 그들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말도 안 되는 것에 매어 잘못된 결정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짓된 자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놓치고 사는 인생에 엄청난 불행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그건 여러분 감정대로 하셔도 됩니다.
여러분 먹고 싶은 거 드시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의 정말 중요한 결정은 말씀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행한 인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왜 그럴까요?
그냥 싫은 거죠.
말씀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냥 자기감정에서 싫은 거예요.
그냥 싫으니까 그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싫으니까. 아무리 그게 옳고 정당 해도, 거기에 장단 맞춰 반응하지 않는 거죠.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고 하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예요?
먹으라는 이야기예요? 먹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까?
그냥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싫은 거예요.
기준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감정에 싫고 좋고 많이 있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싫으니까.
와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그걸 좋게 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자기 싫음에 근거를 막 마련하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이 안 먹어서 귀신 들렸다고 판단했다면, 이제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면 손뼉 쳐 주고 예수님이 옳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세리들 죄인들과 같이 먹는다고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왜 그러는 거죠?
예수님의 그 모습이 그냥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또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우리 인간에 편협하고도 연약한 잘못된 삶의 모습이고, 결국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망치게 한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분들 계세요.
사이가 틀어져서 안 좋은 분들에게 목회자가 그 관계를 회복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라고 말하면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목사님 저 사람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 꼴 보기 싫은데 어떻게 하라고요?'
네~ 내 감정은 싫죠.
그 관계를 회복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감정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그때 어떻게 하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선택은, 여러분의 결정은, 여러분의 호불호. 감정입니까? 아니면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서두에 결혼 상담 중에 "목사님 그래도 좋은걸 어떻게 합니까?"
항변하는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제발 너의 감정에만 기준 삼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점검에 보라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불행이 아니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고 싶네요.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우리 인생에 중요한 판단과 결정은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내 감정과 내 생각, 내 상황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것이 주가 되어서 우리 인생을 그릇 치면 안 됩니다.
다시 말씀에 기준으로 돌아가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 보세요.
그것이 우리 신앙인에 올바른 길이라고,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과 결정 판단할 때에
내 감정과 생각 편견에 치우쳐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우리 삶의 중요한 결정과 선택을 해 나가게 하시고
말씀이 우리 삶을 이끄는 판단 기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말씀 위에 바로 서 나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ND
CGNTV 공식 홈페이지 : http://www.cgntv.net
생명의 삶 구독 : http://www.duranno.com/qt/
|
|
|
'CGNTV > 2021 생명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택함 받은 종의 길, 겸손을 겸비한 긍휼 사역 (마태복음 12:1-21) (0) | 2021.02.09 |
---|---|
온유와 겸손으로 누리는 참된 안식 (마태복음 11:20-30) (0) | 2021.02.08 |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작은 자를 영접한 상급 (마태복음 10:34-42) (0) | 2021.02.08 |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담대함의 비결입니다 (마태복음 10:16-33) (0) | 2021.02.05 |
은혜로 감당할 복음 전파의 사명 (마태복음 10:1-15) (0) | 2021.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