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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1:17~35)(20250209)

2025.02.09. | 생명의 삶 | 윤광서 목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샬롬 영화 교회를 섬기는 윤광서 목사입니다.

 

오늘은 복된 주일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죽음과 생명, 통곡과 기쁨, 절망과 소망 이런 것들은 모두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단어들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할 수 없고, 통곡이 기쁨과 함께 있는 것도 어색합니다.

부재 가운데에 임재함이 있을 리가 없고, 절망 가운데의 소망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는 분명 죽음 가운데에 생명의 역사가 있으며, 

나아가 부활의 생명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지 함께 말씀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하나님 말씀은 요한복음 11장 17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1장 17절에서 35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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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째, 즉 4일이 되던 날 나사로가 죽어 누워 있던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여기서 말씀이 굳이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일러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이 이것을 자세하게 밝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하루 이틀 또는 2, 3일 정도는 떠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날 희망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애도했던 며칠의 시간이 이미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통곡, 절망이 가득한 땅으로 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들의 죽음과 절망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소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울어주던 자들과 통곡하던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그녀의 첫 마디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였습니다. 

마르다의 이 말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신뢰와 원망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으심을 믿었지만,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어서 22절에서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다시금 고백합니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하지만 이 믿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지는 못한 믿음이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소망을 바라보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2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마르단은 마지막 날 부활의 때를 떠올렸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는 유대 전통에 따라 마지막 날 부활의 소망을 품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분임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아직 알지 못했던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친이 자신이 누구신지를 25절에서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음 가운데 생명을, 절망 가운데 소망을 이뤄내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것을 내가 믿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이 말씀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의 주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단지 미래에 있을 어느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현재적인 사건이며 실제적인 생명력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의 주권자이심을 온전히 믿고 있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선포하신 이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질병과 죽음 앞에서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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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오셨음을 전합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단순히 나사로의 동생으로서의 애정을 넘어서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앞서 마르다의 고백과 동일합니다.

두 자매는 모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은 이처럼 믿었지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함께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3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의 비통함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와 죽음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깊은 고뇌와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나사로의 죽음에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깨어진 창조 세계를 바라보시며 이 비통함과 아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눈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35절의 표현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고통에 얼마나 깊이 공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사로 개인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온 인류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늘 본문의 시작에는 굳이 한 말씀을 삽입하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5리쯤 된다고 전합니다.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성경은 나사로의 무덤이 있던 동네인 베다니를 굳이 예루살렘과 연관하여 설명을 합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베다니는 나사로가 죽은 땅입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땅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땅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그리고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슬픔과 아픔을 마주할 때 애통해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고통과 절망에서 생명과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가옆은 우리를 새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주로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나요?

 

 

하나님 아버지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절망과 슬픔이 닥쳐올 때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을 붙들게 하옵소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소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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