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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히브리서 7:1~10)(20230911)

2023.09.11.ㅣ생명의 삶 | 조호영 목사

 

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

 

안녕하세요.

오늘의 교회 조호영 목사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고, 또 수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도 많이 했지만

삶의 변화가 없고 또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나의 모습 때문에 좌절한 적이 있으십니까?

'왜 나는 집사, 권사, 장로가 되었는데도 이럴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늘 걱정과 염려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 '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죠. 

히브리서 4장에 보면

그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이 그들에게 무익했던 이유는

그 말씀과 믿음이 함께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 설교, 말씀들이 그 믿음과 연결이 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죠. 

말씀과 믿음이 함께 가야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임한다. 

이런 히브리서 말씀에 큰 찔림과 또 도전이 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히브리서는 또 계속 

'포기하지 말고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라.'
'그때 다시 믿음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다'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1절에서 10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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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처음 창세기를 읽었을 때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미스터리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길래 갑자기 여기에 나오지?'

라고 의문을 가졌던 인물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변방의 연합군들에게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싸워 이기고 그 조카 롯을 구해옵니다. 

그리고 승리하며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이한 사람이 바로 살렘 왕 멜기세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또 아브라함은 그에게 자신의 전쟁 중에 취한 전리품 10분의 1을 드린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라고 짧게 소개합니다. 

후에 시편 110편 4절에 다윗의 시편에 '주는 멜기세댁의 계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미래 예언적인 선포처럼 다시 멜기세덱의 이름이 등장하고 구약 성경에서는 그 이름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신약에 이 히브리서에서 다시 그 이름이 등장하면서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1절에서 3절입니다.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 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마침내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창세기에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앞에 멜기세덱이 갑자기 등장했는지,

또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 왕의 시편에 멜기세덱, 그 이름이 등장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레위의 반찰을 따라서 세워진 제사장들은 자신의 생명이 있기까지만 그 제사장직을 행할 수 있는 일시적인 제사장입니다.

또 남의 죄를 속죄할 능력도 없고, 그 자신의 죄도 용서를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새롭게 옛 율법의 저주를 끊고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대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세워진 새로운 제사장은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명시된, 인간의 족보 속에 속한 그런 불완전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하늘나라 소속의 제사장이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세워진 멜기세덱 제사장은 얼마나 위대한 제사장인지,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다윗 왕도 다 그 앞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하는 높은 위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3절에 보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닮았다라고 말하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친히 재물 되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불멸의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을 닮은 멜기세덱

바로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예표요,

또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요, 예수님의 그림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생명의 삶의 제목도 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 이렇게 표현한 것이죠.

 

우리도 이 땅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한 족보를 가지고 죄 가운데서 태어난 죄인들이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고 승리하신 예수님 안에서는 다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하지요.

이제 우리는 세상 족보로 세워진 그 조상의 반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멜기세덱 , 예수 그리스도의 반차를 따르고 있는 그런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다윗도 엎드려 절하며 예배하는 예수님은 의의 왕 또 평화의 왕으로 지금도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매일매일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는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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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잣대로 자신들의 신분을 구분하며 살아왔습니다. 

양반이냐? 상놈이냐? 성골이냐? 진골이냐? 귀족이냐? 평민이냐?

요즘은 또 금수저냐? 흑수저냐? 넌 돈이 많으냐? 적으냐? 가방끈이 기냐? 짧으냐? 외모가 좋으냐? 아니냐?

다양한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 신분을 나눕니다.

그리고 이런 잣대로 만들어진 정체성은 사람들을 교만하게도 하고 또 좌절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세상의 평가가 우리의 정체성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렇게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은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어려움 속에서 지금 고난 받고 있고 또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며 끝까지 예수님 붙잡고 인내하라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주의 자녀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오늘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차로 새롭게 태어난 주의 백성들이여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예수님의 덕을 밝히 드러내면서 살아라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붙여진 그런 없어질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믿음으로 소망 가운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간다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바울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또 이방인 전도사였던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도 도전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들은 이제부터 이 땅에서 당당히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믿고 확실한 하늘 시민 정체성을 가지고 살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인데요.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늘나라에 속한 자들 성도들은 세상에 축복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늘나라 대제사장으로부터 은혜를 간구하고 축복을 간구하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영원하지 않은 것, 곧 사라질 것에 눈을 이젠 돌려서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을 소망하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죠.

아브라함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 앞에서 절하고 또 전리품의 10분의 1을 드렸으며 감사했고,

그의 축복 기도를 받았던 것은 그 승리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6절, 7절 함께 읽겠습니다.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요즘 십일조 논란이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꼭 11조를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에 보면 창세기 아브라함에게 아무도 십일조를 드리라 그렇게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조카 롯을 구해온 모든 그 과정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믿고 있고, 또 그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그 전리품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의무나 강제나 억지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믿음이 그 베이스에 깔려 있고, 그것이 믿음의 행위일 때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또 우리의 인생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차를 따라 새롭게 거듭난 그런 하나님의 백성임을 절대로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구합니다.

 

'죽게 될 사람'과 '영원한 생명' 중 어느 쪽에 소망을 두어야 할까요?

 

하나님, 우리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왕이 하나님이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차로 태어난 거듭난 피조물로 이 땅 가운데 주의 덕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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