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1. | 생명의 삶 | 이해영 목사
안녕하세요.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이해영 목사입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보배는 눈이라고 할 수 있겠죠.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의 이 말은 거의 전적으로 영적인 시력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안목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미혹하고 있는 화려한 수많은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서는 눈을 감고 주의 임재와 영광을 보는 눈은 온전히 떠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창세기 18장 1절에서 15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섬긴 환대, 아들 약속 재확인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1절을 다시 읽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 아브라함은 한낮 뜨거울 때에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 장막 문에 앉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을 중요하게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장면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죠.
오직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자신을 드러내셔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타나시는 그분을 또한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에서도
요한복음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알지 못했던 고기 잡던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여기서도 떠오릅니다.
우리들에게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원하고 그러한 눈을 볼 수 있도록 우리는 더욱더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지중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눈치챌 수 있고 알아볼 수 있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절과 3절의 말씀도 보시지요.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서 보았다라고 합니다.
그때 세 사람이 맞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영접했고 몸을 땅에 대고 굽혀 엎드렸다고 말합니다.
아주 융숭한 영접의 모습을 보여주죠.
이러한 인사는 고대 근동에서 귀한 손님 또는 귀한 방문자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그런 인사 양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나그네를 영접하는 모습으로만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 중 한 분이 여호와인 줄을 알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데 9절까지는 계속 '그들이 아브라함에게'라고 언급되어 있지만
13절에서 비로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라고 그렇게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이신 줄 알지 못하다가 말씀을 듣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치 디베아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예수신 줄 알지 못하다가 후에 주시다는 그런 인식이 열리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에게 나무 아래에서 쉬도록 하고서 이제 음식을 먹고 떠날 것을 간청하지요.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시지요.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때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하인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가 급히 요리를 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장막으로 들어가서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해서 떡을 만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새 스아의 분량입니다.
새 스하라고 하는 것은 약 22리터 분량이 되는 그런 밀가루 분량입니다.
대단히 많죠.
대략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큰 장치의 양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평범치 않은 나그네를 영접한 것이오. 나그네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분명히 아브라함이 이 손님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신 줄 알고 큰 잔치 일종의 왕의 잔치를 베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그가 하나님이신 줄 알겠고,
그 눈이 열려야 우리가 마땅히 그분을 어떻게 영접하며 어떻게 우리의 삶을 헌신할 것인지 삶으로써 드러나겠지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눈이 열리고 그러한 삶이 펼쳐지기를 축원합니다.
9절을 다시 봅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이 세 사람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9절부터 이제 능동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갑니다.
또한 '네 안에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그렇게 묻죠.
이 물음은 더 이상 이 세 사람이 단순한 나은 애들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살라의 이름을 알았습니까?
그리고 여기에 아브라함이 놀라지 않지요? '장막 안에 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지금 이들이 평범한 나은 애들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짐작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시죠.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내게로 돌아오리라.
내 안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라고 그렇게 예고합니다.
지금은 약속만 가지고 왔지만 그러나 다음에는 약속의 실현을 가지고 다시 올 것이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약속과 성취 그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바라며 또 성취를 기다리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이 말을 사라가 장막에서 엿듣고 있었죠.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남편이 노쇠하고 늙었는데 자신에게 어떤 기쁨도 있지 않은 이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웃은 그런 웃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웃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드디어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세 사람 중 한 분이 여호와시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사랑의 마음까지 읽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는 우리 모두의 중심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언약함까지도 하시는 그분께서 이제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14절과 15절입니다.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여호와께서 능치 못하실 일이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무나 장엄하고 감동스러운 주님의 선포입니다.
인간에게는 기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그저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지만, 우리가 늘 불신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환경의 어려움들로 인해서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나요?
우리도 사라처럼 마음속으로 비웃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근심 속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죄악 중에 계속 떠나지 못하는 삶이 우리들에게도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눈을 들어 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보이지 않으나
정말 살아계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낯선 이로 다가오실 때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가 전심으로 왕의 잔치를 베풀고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거룩한 헌신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고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CGNTV > 2022 생명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지중에 환대한 천사, 위기에서 건지시는 손길 (창세기 19:1~11)(20220903) (0) | 2022.09.03 |
---|---|
죄악의 도시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16~33)(20220902) (0) | 2022.09.02 |
현실과 약속의 간극에도 순종하는 믿음 (창세기 17:15~27)(20220831) (0) | 2022.08.31 |
영원한 언약, 언약의 표징 (창세기 17:1~14)(20220830) (0) | 2022.08.30 |
고통받는 자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창세기 16:1~16)(20220829) (0) | 2022.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