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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로마서 7:7~25)(20250918)

2025.09.18 | 생명의 삶 | 노치형 목사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샬롬

오늘도 하나님께서 거룩한 날을 주셨으니 이 거룩함을 기쁨으로 누리며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저는 온누리교회를 섬기는 노치영 목사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부담이 되시나요? 아니면 너무나 평안한 느낌을 갖고 또한 기쁨을 체험하게 되시나요?

이 거룩함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감동을 주는 단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잘 성찰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2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로마서 7장 7절에서 25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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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바로 우리를 이 땅의 삶에 익숙해져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성경에서 거룩함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우리 안에 있는 속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이 속성이 우리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늘 거룩함이라는 단어보다는 다른 단어에 익숙해져 있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함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거나 거북하거나 또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며 그 죄로 향해 나아가는 삶이 더 자유를 누리는 삶인 것처럼 누리고 또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를 향해 가는 마음을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까?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계속해서 말하면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통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7절부터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이 아니면 죄가 죽은 것이다 라는 이 고백이 우리를 좀 힘들게 만듭니다.

율법은 죄를 다스리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의 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금은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죄냐 아니냐라는 것을 판명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죠.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는 그 율법이 어떤 판단의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기준이 됩니다. 어떤 기준입니까? 바로 죄를 깨닫게 하는 기준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갈 때, 어떤 땅을 걸어갈 때, 아무런 금도 없고 줄도 없는 곳을 지나간다면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금을 쳐놓고 줄을 쳐놓고 그곳에 금지라고 써놓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곳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갈등을 누리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그것에 대한 기준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기준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줄을 쳐놓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탐심을 갖지 말아라 탐하지 말아라 말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탐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것이죠.

 

이 탐심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타락의 시작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뱀으로 등장하는 그 사탄의 거짓말을 들은 하와가 속임을 당하게 되고 또한 아담도 속임을 당하게 되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에 대해서 요한일서 2장 16절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는 이 육신의 정역과 안목의 정역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준다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 말씀에 집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길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다시 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의 음성을 듣는 오늘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가 율법적 기준에 매여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내가 율법적 기준에 매여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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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율법을 생각할 때 그것이 내가 죄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론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알았지만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의 모든 흐름과 그 가르침과 그 모든 문화의 영향력이 힘들게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짜 우리가 선택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우리 앞에는 너무나 큰 걸림돌이 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 11절을 같이 읽습니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죄가 기회를 타면 우리를 속일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죄에게 속아 넘어가서 또 한 번 실수를 하고 또 다른 실수를 하고 또 다른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런 실수가 반복되고, 우리의 삶에 자꾸 쌓이게 되면, 노폐물이 많이 쌓여서 우리의 몸이 약해지고 병들게 되는 것처럼 그러한 일이 우리 속에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라는 것이죠.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17절부터의 말씀을 읽습니다.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아맨.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 라는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하기 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악이 더 강하여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죠.

 

세상에 많은 격언들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선과 악이 있고, 어둠과 빛이 있는데, 네가 그 두 가지의 짐승들 중에 어떤 쪽에 음식을 주느냐? 식량을 공급하느냐? 에 따라서 그것이 승하고 폐하는 것이 달려 있다. 꼭 우리가 뭔가를 해야 되는 것처럼 아주 교묘하게 말을 섞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 두 마리의 짐승을 우리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야 할 존재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속에 관은 죄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그 죄는 우리에게 또한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 거하는 죄가 그 일을 행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피할 곳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는 더 이상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복음의 원리처럼 우리에게는 이런 말씀이 주어집니다. 22절의 말씀입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우리의 속사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죠.

그 속사람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 새 힘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죄 속에 거해 선한 것을 원하지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있지만 우리는 이 안타까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십니다.

 

 

내가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섬긴다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요?
내가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섬긴다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요?

 

 

선하고 의로우신 사랑의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소망하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회개하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사망의 몸을 벗어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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