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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죄의 돌을 버리고 사랑과 용납으로(요한복음 7:53~8:11)(20250127)

2025.01.27. | 생명의 삶 | 도육환 목사

 

정죄의 돌을 버리고 사랑과 용납으로

 

 

할렐루야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도육한 목사입니다.

우리에게 설날이 중요한 명절이듯이, 초막절은 6월 절, 77절과 함께 유대 3대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도 명절이 되면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데 모이고, 오랜 고향 친구들을 만나며 함께 식사하고 즐기지 않습니까?

유대인들도 초막절을 맞으면 추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명절을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명절의 기쁨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살벌한 함정과 정죄하는 마음이 독사처럼 고개를 들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의 음모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지혜와 사랑이 어떻게 드러났는지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11절 말씀까지 묵상합니다.

 

 

정죄의 돌을 버리고 사랑과 용납으로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11절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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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묵상 말씀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은 감란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각기 제길을 찾아 자신의 쉴 곳을 떠났지만, 우리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남산으로 가셔서 기도하며 밤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아침이 되어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진리에 굶주린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은혜로운 자리에 고약한 불청객들이 끼어듭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종교들에게 행운이라 여길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누군가 두 남녀의 불륜 현장을 발견했고, 그 자리에서 여인을 끌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야비하게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정의롭고 적법한 해결을 찾아온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범죄 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에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넘어뜨릴 만한 함정만을 찾아낸 겁니다.

 

 

그들의 고발 장면을 보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현장에서 불륜 행위를 해서 잡았다면, 공회나 재판장으로 끌고 가서 판결을 받게 하는 것이 맞는데,

아무런 법적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는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간음죄라면 분명 상대가 있었을 텐데 동일하게 처벌받아야 할 남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신명기 22장 22절에 보면, '남녀가 간음을 행하면 그 통관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에서 악을 재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자만 희생양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녀가 유부녀였든 또 싱글이었든 알지 못하지만, 남편이든 상대 배우자든 부모이든

누군가가 있었다면 더 분노하고 힘들어야 할 이해 당사자가 있었을 텐데,

그 자리에 직접적인 피해자는 없고 제삼자들만 모여서 온갖 비난을 퍼붓고 돌을 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의도는 교활하고 악의적입니다. 

 

 

그들은 덧을 쳐두고 예수님께서 올무에 걸려들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늠한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했다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용서의 교훈과는 배치될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총독에게만 주어졌던 그 사형 집행권을 유용한 살인교사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용서하고 놓아주라고 했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파괴하는 자라고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을 내려도,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도 올무에 걸려 넘어가도록 만든 함정이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와 정죄하며 도를 든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을 보다 보면, 짐짓 의로운 척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왜 주님께서 저런 사람 그냥 두시느냐? 불평도 했습니다.

마음에 든 돌로 정죄하고 판단하여 더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때도 있었습니다.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 간음한 여인 못지않게 마음의 죄들을 짓고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범죄에 대해서 마치 심판자인 것처럼 분을 낼 때도 있었던 우리 모습이 보입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대해 엄한 처벌을 명하신 것은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고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보호 장치였지, 이것이 누군가를 정지하기 위해서 돌을 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정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거룩함과 가정과 사회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재정하신 율법의 의도를 잊어버리면 사나운 심판자의 자리에 서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도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을 사랑하신 그 주님의 마음을 함께 배워가기를 바랍니다.

어느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그 죄에 대해서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누군가를 시험에 빠뜨리거나 정죄한 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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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과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흠을 잡기 위해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데려와 질문했을때

우리 주님은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반응이 없는 주님을 향해 종교 지도자들은 더욱더 대답을 재촉합니다. 7절에서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준비한 함정에 쉽게 들어오지 않자 그들은 계속 답변을 요구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몸을 일으켜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남기시지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주님은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기 시작하십니다.

군중들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자신은 죄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먼저 돌을 던져야 했는데, 그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 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신 그 글은 둘러싼 사람들의 죄목, 지은 죄들을 쓰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설사 주님께서 땅바닥에 자신의 죄목을 적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그 주님의 의로운 빛 앞에 어찌 자신의 죄를 숨길 수가 있었겠으며, 

양심들이 살아 있는 한 어찌 나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핵폭탄처럼 충격적이어서 누가 먼저라도 할 것도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고 있던 돌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자신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어른들부터 먼저 양심에 찔렸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정죄하고 손가락질하려고 할 때 내 안에도 그와 같은 죄와 허물이 있다는 사실

부인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제 젊은이들까지 마음에 찔려 다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거기에는 도래마다 죽을 상황까지 갔던 한 여인과 하늘의 지혜로 함정을 물리치신 예수님 둘만 남았습니다.

여인은 죽음의 공포와 수치심으로 몸을 떨다가 주의 은혜와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그제야 여인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보았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겁니다.

자신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여인의 죄를 문책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보십시오.

여인에게 죄가 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죄 지었지만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다시는 죄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죄 그 자체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돌아서는 것이고 죄를 돌이키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이고, 

그 돌이킨 마음을 받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고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죄에 대해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동시에 다시는 그 죄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온전히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죄를 멀리 함으로 날마다 거룩함을 향해 한 걸음씩 더 다가가고 누구를 정죄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더 거룩함으로 이 한 해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죄의 돌을 버리고 내가 용납하고 보듬어야 하는 지체는 누구인가요?

 

 

존귀하신 주님 
우리는 그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으며,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추격하던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새 생명과 새 삶을 허락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하는 이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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