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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의 온전함, 아브라함의 선입견 (창세기 20:1~18)(20220907)

2022.09.07. | 생명의 삶 | 권오향 목사

 

아비멜렉의 온전함, 아브라함의 선입견

 

안녕하세요.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권오양 목사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보호 본능이 있죠. 

그러나 그 본능에 너무 집착한다면 매우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이 보호 본능에 집착한 나머지 두 번씩이나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지 자신에게 있지 않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주관자이자 약속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 20장 1에서 18절입니다. 

 

 

아비멜렉의 온전함, 아브라함의 선입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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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오늘 본문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요. 

아브라함은 소돔성이 멸망한 후 약 20년간이나 정착해서 살던 헤브론의 마무리를 떠나서 그랄 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랄은 블레셋의 남쪽 지역에 위치한 조그마한 성읍이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이사하자마자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게 됩니다.

당시 그라레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데려간 것이었죠.

이와 같은 행동은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관습으로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국의 통치자는 자기 마음에만 들면 언제든지 아내로 취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더구나 이 일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24년 전에 애굽에서 저지른 실수를 똑같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도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생존에 대한 그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라를 주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기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방어 본능이었죠.

 

그러나 이러한 방어 기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성숙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소돔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성숙한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 그의 내면에는 두려움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과제가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모든 위험과 위협 속에서 살아남았어야 하기에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 기제가 저절로 작동이 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두려움이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감정이기에 반드시 다루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와 신앙을 동시에 내팽개친 아브라함을 꾸짖는 대신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7절인데요.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의 개입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후손 의의 언약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낯부끄러운 불신을 건드리시는 하나님의 간섭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도록 간섭하시며 약속대로 신실하게 일하시는 분이심과 동시에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통하여서 인류의 구속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아브라함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 실수 많고 제 많은 우리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믿으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내가 온전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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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를 무마하시면서 사라를 아베멜렉의 손에서 구해내셨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한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마땅히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을 행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면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는 스스로 치러야 하고 그 결과로 수치와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죠.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할 때 가진 핑계와 자기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생각을 쏟아 놓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결과만 낳을 수 있죠.

그런데도 아비멜렉은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풍성한 선물까지 달려 보냅니다.

아브라함의 비겁한 행동과 아비멜렉의 후한 인격이 대비되고 있죠.

이처럼 믿는 사람이 믿지 않은 사람보다 그 인품과 행동이 덕스럽지 못할 때 그 결과는 수치를 당하게 되고,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은 예수님 담는 인격이요 성품입니다. 

바라기는 날마다의 삶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저희 모두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죠.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유지되는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하나님은 언약 당사자의 연약함과 불성실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증표가 바로 17절입니다.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하나님은 오히려 아브라함을 중보자로 세우셔서 아비멜렉 집안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도하게 하신 것은 여전히 아브라함을 언약 당사자로 여기신다는 뜻이오.

이미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죠.

우리의 연약함이나 실수에 연연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미끄러진다 할지라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일어서 달려갈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내가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선입견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는 늘 연약하여 넘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변함없는 주님의 약속대로 이끌어 주심을 믿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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