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5. | 생명의 삶 | 서경남 목사
할렐루야
안녕하세요.
온누리 교회 섬기고 있는 서경남 목사입니다.
유럽을 다녀왔고 그리고 또 유럽의 관광지를 가보면
참 유명하고 멋있고 그리고 참 많은 사람들이 관광지에 참여하는데 이렇게 보면은 다 하나같이 총구멍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또 남미나 중국이나 또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데 또 보면 화살 구멍 아니면 총구멍이 다 있더라고요.
지구상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싫어하는 전쟁이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참 무섭고 잔인하고 파괴적이고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전쟁과 평화'라는 월 인피스 레어날 토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죠.
'데스 노 그레이트네스 데스 노스 플레스리 굿네스 앤드 트루트'
'위대한 것이 그리고 또 단순한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 없으면 진리가 없으면 위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창세기 14장 1절부터 16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아브람의 용기와 하나님의 구원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
아브라함 당시에도 잔인하고 살벌한 전쟁이었습니다.
1 절에 보면은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은 다섯 왕 여기에 나오는 네 명의 왕들이 한 그룹이 되어 있고 현대 전쟁들도 대부분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동맹군이나 팀이나 족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절, 3절에도 보면 아 참 이런 말이 있죠.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그랬어요. 싸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이들은 다 스틴 골짜기에 곧 지금은 사해라고 부르죠.
이것은 뭐냐 하면 왜 싸움이 이렇게 일어날까?
그때도 지금도 뭐냐 하면 지금까지 참았다는 것입니다.
견디고 견디었으니까. 내가 참을 때까지 참았다.
이것이 전쟁의 뿌리의 죄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를 보면 몇 사람이 이러한 지금까지 참았다. 견디고 견뎠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못 참겠다 하는 것이 큰 전쟁을 이루는 것이 역사입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인간의 탐욕 즉 남을 이기고 빼앗고 지배하려는 그런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전쟁이 우크라이나나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한 사람 몇 사람의 이러한 욕심과 그리고 그 경제적인 모티프가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이런 분 이번에도 레바논에 가서 난민 사역을 이제 그 아우리치를 갔다 온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민족은 있지만 하지만 땅이 없는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 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누릴 수 있는 좋은 땅에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눈물과 아픔과 쓰라림과 그리고 미래가 없는 그 난민들을 볼 때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고 우리가 참 우리 팀들이 봐도 너무너무 나 아픈 것은 이게 전쟁, 죄의 결과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보통 전쟁을 동맹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패거리라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렸을 때 골목에서 아 공기놀이 그리고 땅따먹기 딱지치기 또 고물줄 놀이 등등 이러한 그 어렸을 때부터 놀던 것들이 그러나 나중에는 싸움이 나곤 했습니다.
또 학교에 들어가면 패싸움, 직장에서도 싸움 끼리끼리의 싸움 그리고 편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지하철 안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불평하면서 야 이곳이 교회인 줄 알아?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싸워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도하는 사람이 많냐? 교회에서 떠난 사람이 많냐?
물론 전도하는 사람이 많아야 되죠. 하지만 요새는 안 그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집안과 그리고 집안의 싸움, 가문과 가문 싸움, 당파끼리 싸움 정치죠.
이 싸움의 원인들은 4절에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은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그랬어요.
여기에 보면 중요한 단어는 섬기다가 두 번째 단어는 배반하라는 것이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도돌라 오메이 참 강했어요.
그리고 배반한 사람은 입장과 그리고 배 배반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항상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배반을 당했다는 것은 내가 배반을 당했다는 뜻과 동일한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상대방이 배신을 할까요?
그만큼 당했기 때문에 배신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보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야고보서는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인간 속에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남을 이용하고 그리고 조정하고 그리고 당을 짓는 것이 서로 투쟁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들이 성경은 주님께서는 이거를 뭐라고 말하냐면 죄라 그러고요.
그리고 이것을 말하면 욕심이라 그러고요.
그리고 이거를 말하면 참 인생의 자랑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나야지 더 깊은 믿음의 단계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하십시오. 다툼을 피하십시오. 배신을 피하십시오.
모든 것을 모든 염려를 주님 앞에 맡기면 그러면 모든 것이 더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쟁 가운데 그 가운데 아브라함의 친척 조카 롯이 사로잡힙니다.
14절 15절의 말씀은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던 것을 되찾았던 시간입니다.
아 훈련 대자 318명이 아브라함은 로세 소식을 듣고 그냥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동원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18명은 굉장히 소수의 사람이죠.
하지만 믿음은 무언가 행해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심어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냥 주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걷습니다.
믿음이 믿는 사람은 뛰어갈 수 있는 용기가 성령께서 인도해 준다는 것입니다.
불가능 속에서도 도전을 해보고 없는 것을 잊게 만들고 안 된다는 것을 되게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은 과거의 상처를 준 사람에게 기회만 있으면 복수하려고 생각합니다.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사이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네가 좌로 가면 내가 우로 가고, 네가 우로 가면 내가 좌로 가겠다.'
'우리가 더 같이 같이 살 수가 없겠다' 하는 그 상처가 있습니다.
롯도 어떻게 보면은 자기는 소동과 고무하는 땅에 참 좋은 땅을 바라보면서 그 땅을 골랐던 사건이 있지만
하지만 아브라함은 지금 전쟁을 하면서 롯을 구해주는 사건 가운데 세상의 계산으로 볼 때는
너 버릇 좀 고쳐줘야 되겠다 하고 해서 그냥 놔뒀을 것입니다.
하지만은 아브라함은 인제 참 많은 믿음의 역경과 경험 속에서 훈련 가운데서
이제는 버릇을 고쳐주고 그리고 너의 잘못함을 이제는 내가 이제 때는 이때다 하고서 보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인하여 이제 전쟁하러 나갑니다.
그리고 롯을 구하고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아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배워 줄 것을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참 버릇 좀 고쳐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을 버릇 고쳐주겠다. 하지 마시고
부인을 혼내주려고 하지 마시고,
자식을 막 무대가로 남으라고 하지 마십시오.
혼내는 것은 절대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죠.
한 가지의 책망보다도 열 가지의 격려가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자녀들도 아 우리가 짐에 참 고치려고 억지로 고치려는 것 보다도
같이 어려움과 고난과 그리고 참 삶의 이 벽들을 같이 참여해 주고 이해해주고 믿음으로 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부모님들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잘못하는 사람 물론 있죠.
그리고 또 신앙이 약한 사람 믿음이 약한 사람 물론 있죠.
하지만 그들을 뭐라고 말하는 것보다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보다도
격려해주며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시선으로 인하여 사랑의 눈길을 베풀 수가 있다면
훗날에 훨씬 더 참 창의적이고 그리고 건설적이고 힘 있는 참 교회를 만들지 않고 가정이 만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이러한 가정이 되기를 바라고 이러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이러한 대한민국과 우리의 민족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마음이 눈이 가는 대로 선택했다가 위험에 빠진 롯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소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상황을 보거나 들을 때에 기꺼이 도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소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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